The Korean Society Fishries And Sciences Education
[ Article ]
The 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for Fisheries and Marine Sciences Education - Vol. 32, No. 5, pp.1125-1136
ISSN: 1229-8999 (Print) 2288-2049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31 Oct 2020
Received 26 Aug 2020 Revised 15 Sep 2020 Accepted 25 Sep 2020
DOI: https://doi.org/10.13000/JFMSE.2020.10.32.5.1125

우리나라 고등수산교육에 관한 사적 고찰

강버들
부경대학교(교수)
A Historical Consideration of Higher Fisheries Education in Korea
Beodeul KANG
Pukyong National University(professor)

Correspondence to: 051-629-5977, badlle@pknu.ac.kr

Abstract

Human beings need food although the future society comes. The fisheries industry, which is the basis of food supply, is very important. The development of fisheries industry leads to the development of fisheries human resources and fisheries education. Thus, the historical consideration of Korea's higher fisheries education institutions is meaningful.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find the direction of future fisheries education through transmission and development process of fisheries education in Korea. First, fisheries education was transmitted into Korea by Japan in the 1910s. Second, after the liberation and the Korean War, the fisheries higher education institutions in the Busan region grew for over 70 years. Third, to prepare for the future, fisheries education needs a paradigm shift to convergence education.

Keywords:

Historical consideration, Higher fisheries education institution, Future fisheries education

Ⅰ. 서 론

해양수산자원은 인류의 식량자원으로서 그 중요성이 점차 커지고 있다. 지구 전체의 약 71%를 차지하고 있는 해양은 많은 양의 자원을 가지고 있으므로 타 분야보다 발전가능성이 높다. 특히,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 수산 분야는 배제할 수 없는 산업의 근간이 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수산업은 4D(Difficult, Dirty, Dangerous, Distant)라는 편견으로 인해 일반인들이 기피하고 있는 실정이다.

4차 산업혁명으로의 산업화는 치열한 국가 간의 경쟁 속에서 이루어지므로 인적자원의 개발이 더욱더 중요하다. 특히 AI의 발달과 확산은 미래의 수산업 관련 일자리에 대한 고민과 이를 위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새로운 교육시스템으로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Kang, 2019).

수산업의 성장과 수산교육에 의한 인재 양성은 불가분의 관계이며, 우리나라 수산교육의 뿌리를 찾아 그 변화 과정을 탐색하는 것은 미래의 수산교육 방향 탐색을 위한 의미 있는 과정이다.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수산교육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의 수산교육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부터 연구가 시작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와 관련된 수산교육에 대한 연구는 미비하다. 기존 선행연구는 전라북도의 수산교육 역사에 대한 Kim and Lee(1993)의 연구, 일제하의 수산학교 교육에 관한 Shin et al.(1999)의 연구, 전습소의 설립과 수산교육에 관한 Rhee(2010)의 연구, 일제강점기 여수수산학교의 수산교육(Jeong, 2011) 등이 있을 뿐이다.

Kim and Lee(1993)Shin et al.(1999)의 연구는 수산교육을 수행하고 있는 학자의 입장에서 전라북도 군산 지역의 중등교육기관에서 이루어진 수산교육 역사와 일제 강점기의 수산학교 교육에 대한 탐색이었다. 그리고 Rhee(2010)Jeong (2011)의 연구는 사학자의 입장에서 전습소의 설립과 수산교육에 관한 연구, 일제강점기의 여수수산학교에서 이루어진 수산교육과정에 대한 것이었다. 이에 우리나라 고등수산교육의 근간이 되어온 수산교육에 대한 사적 고찰이 필요하다.

사적 고찰을 통한 고등수산교육기관에 대한 역사적인 탐색과 논의를 기반으로 인공지능과 첨단과학이 지배하는 미래사회에 적합한 수산인적자원을 개발하기 위한 수산교육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기초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본 연구는 그 의의가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등교육기관을 중심으로 수산교육의 이식과정과 발전과정에 대한 사적 고찰을 하고자 한다.

본 연구는 문헌 고찰로써 고등교육기관 발행 역사서, 학보, 당시 신문, 관련 문헌 자료 등을 통해 자료를 수집하였으며, 연대별로 분석하였다. 특히 1930-1940년대 신문의 경우 최대한 원문을 그대로 살리고자 하였다. 그러다 보니 띄어쓰기, 맞춤법, 두음법칙 등 현재와는 상이한 점이 매우 많다는 것 또한 새로이 알게 된 사실이었다.


Ⅱ. 우리나라 수산교육의 이식과정

한국과 일본은 역사적,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교육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 수산교육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Rhee(2010)에 의하면 1888년 수산전습소는 대일본수산회에 의해 후생관 내에 설립되었다. 이 전습소는 일본 최초의 수산교육기관이었으며, 교육과정 중에 수산학이라는 과목이 있었다. 수산전습소의 졸업생들 대부분이 수산 관련 행정, 교육, 실험 분야에 진출하였다. 수산전습소와 그 후신인 수산강습소 출신들 중 일부가 조선총독부에 파견되어 조선의 수산업 현황을 조사하여 조선의 수산에 대한 최초의 종합조사보고서인 ‘한국수산지’를 1908년에 편찬하였으며, 그들은 이후에도 우리나라의 수산정책을 주도한 것으로 파악된다.

한편, 일제는 1911년 조선교육령과 어업령을 공포하고, 조선총독부 식산국에 수산과를 두고 수산물 약탈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수산물 증식을 위해 은사금사업(恩賜金事業)이라는 명목하에 수산기술원을 배치하여 계절적으로 어업전습소를 개설하였다. 이와 같이 일제하의 수산교육은 우리의 자생적인 필요에 의한 교육이 아니고, 일제의 식민지 정책수행을 위한 수산교육이었다는 데에 한계가 있다. 특히 어업전습을 통한 교육은 수산업에 종사하는 어민들을 대상으로 어획량 증식을 위한 기술을 가르치는 교육이었다. 이러한 어업전습 교육의 목적은 우리의 어민들을 잘 사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한국의 수산물을 착취하기 위한 기능인을 양성하는 데 있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일제는 간이수산학교를 통해 본격적인 수산기능인을 양성하였다(Shin, et al., 1999).

이와 같이 근대화된 교육기관이 설립되기 이전 우리나라에서의 수산교육은 우리 자신의 필요에 의한 교육이 아니라 일제에 의한 우리나라 수산물 수탈이라는 일제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의 수산교육은 계절적으로 개설된 전습소에서 일본 수산기술자에 의해 이루어졌다.

군산공립간이수산학교가 1915년에 설립되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정규 수산교육기관의 효시이다. 이후 1917년에 여수공립간이수산학교, 1918년에 경남에 통영수산전습소가 설치되었다. 1920년에 어업전습소를 수산전습소로 변경하고, 입학자격을 공립보통학교 졸업자로 하였다. 1921년에 여수공립간이수산학교가 여수공립수산학교로 승격되고, 1923년에 통영전습소는 통영공립수산학교로 승격되었다. 1938년 남해공립수산실습학교가 설립되었다(KNU, CNU, GNU, 2020).

우리나라의 수산교육은 일제강점기의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일본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그리고 일본에 의한 우리나라 수산자원의 효율적인 수탈을 위한 수산기능인 양성은 필수적이었고, 이러한 과정에서 일본의 영향 아래 자연스럽게 수산 관련 전습소 및 간이수산학교의 설립과 더불어 수산교육이 이식되었다.


Ⅲ. 우리나라 고등수산교육의 발전과정

우리나라 최초의 고등수산교육기관은 부산고등수산학교였다. 1941년 4년제 전문학교로 개교한 부산고등수산학교는 부산수산전문학교(1944), 부산대학교 수산과대학(1946년), 부산수산과대학(1946년), 부산대학교 수산대학(1962년), 부산수산대학(1964년), 부산수산대학교(1990년)를 거쳐 부경대학교 수산과학대학(1997년)으로 발전하였다(PKNU, 2016).

이에 고등수산교육의 발전과정을 수산고등교육기관의 설립 운동(태동기), 우리나라 최초의 고등수산교육기관이었던 부산고등수산학교(설립기), 부산수산전문학교(시련기), 부산수산대학교(성장기), 부경대학교 수산과학대학(재도약기)의 순으로 탐색하고자 한다.

1. 태동기: 수산고등교육기관의 설립 운동

수산고등교육기관 설립 운동은 1921년 4월 함경남도 도청에 의해 제일 먼저 시작되었다. 그리고 1921년 7월 총독부에서 개최된 제1회 조선산업위원회에서 수산고등교육기관 설립 문제가 논의되었고, 당시 수산업의 중심지였던 부산에 수산고등교육기관을 설립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의하였다. 이어 1925년 조선수산회에서 수산교육의 보급과 발달을 도모하고, 해마다 늘어나는 고등보통교육 졸업생들의 진학을 위하여 경남에 전문학교 수준의 수산학교 설립을 조선총독부에 건의하였다(NFUP, 1991).

부산고등수산학교의 설립 준비에 참여하기도 하였던 일본 구주제국대학의 여전양(與田讓)은 1920년대 중반 한반도 연안의 수산업에 관한 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얻은 결론 중 한국의 수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강구 해야 할 여러 가지 대책 중 반드시 실현되어야 할 것이 고등전문학교의 설치라고 하였다. 그리고 1936년 농림성 수산강습소 출신이었던 황문달(黃文達)은 ‘약진조선수산계(躍進朝鮮水産界)에 고등수산기술원양성기관의 설립을 촉구한다’ 라는 글에서 수산업을 보다 진보시키기 위해서는 수산방면의 인물 양성에 주력해야 하며, 이를 위해 고등수산학교의 설치를 주장하였다(NFUP, 1991).

南北兩處에 水産專門校設立: 조선믜 수산교육의 시설은중등학교정도(1교)와 림시강습소만 잇슬분으로 다른교육기관에 비하야 매우 빈약한 관계상000수산과에서는 학무국에대하야 수산전문학교설립의 필요를적극 요망한결과 림학무국장도 소화9년도 사업으로남북면해 주요지에 전문정도믜수산학교믜 설립을 계획하고밋다(Joongang Daily, 1933. 1. 26).
 * 최대한 원문대로 옮겨 적음

이와 같이 도청, 조선수산회, 일본 학자, 조선총독부 등 내면적으로는 서로 다른 이유가 있었지만, 표면적으로는 한국의 수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고등수산교육기관의 설립을 통한 수산인 양성을 목적으로 제각기 자신들의 입장에서 수산고등교육기관 설립의 필요에 대한 지속적인 제안이 이루어졌다.

마침내 1941년 부산고등수산학교 규정(총독부령 제97호)에 의하여 부산고등수산학교가 설립되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 설립되어 있던 고등교육기관은 18개교였다. 이들 교육기관 중 의학계열이 가장 많았으며, 공업, 농업, 상업, 광업 등이 있었고, 수산 관련 교육기관은 없었다. 수산 관련 고등교육기관은 1941년 설립된 부산고등수산학교가 최초이다(KRIVET, 1998).

따라서 한국의 고등수산교육기관 설립에 대한 논의는 도청, 조선수산회, 총독부 등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한국 측은 우리의 수산업을 발달시키기 위해, 일본 측은 한반도 연해의 수산자원을 수탈하기 위한 수산기능인 양성의 목적으로 설립 운동이 이루어졌다.

2. 설립기: 부산고등수산학교의 설립

부산고등수산학교의 설립 초기에 수산강습소측은 생산(어로+양식)과 제조의 2부문으로, 문부성 측은 어로, 제조, 양식의 3부문으로 양식과의 개설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였다(NFUP, 1991). 그 이유는 1940년 당시 한국에서의 수산교육은 태평양전쟁 준비에 필요한 수산자원의 채취와 증식을 위한 고급기술자를 양성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부산고등수산학교는 중학교 졸업자로 입학 자격을 두고, 수업 연한은 4년, 어로학과, 제조학과, 양식학과의 3과를 두게 되었다. 교수진은 수산강습소 출신 위주로 구성되었다. 최초의 입학자를 선발하기 위한 입학시험은 수원고등농림학교에서 실시되었는데 52명 모집에 202명이 지원(Busanilbo, 1941)하였으며, 경쟁률은 3.9:1이었다. 선발 결과 입학생은 어로학과 21명(7명), 제조학과 22명(6명), 양식학과 9명(2명) 총 51명이었다(괄호:한국인). 이 중 한국인은 총 15명이었다. 이것으로 보아 초창기의 고등수산교육은 광복되기 전이므로 한국인(28.8%)보다는 일본인(71.2%)이 더 많았다. 양식학과보다 어로학과의 인원이 더 많았던 이유는 키우는 어업보다는 잡는 어업으로의 선호도가 더 높았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부산고등수산학교의 매주 수업시수는 학년당 39시수이다(<Table 1>). 특이한 점은 실험 및 실습 시수가 전체 시수의 약 24%∼35%로 교육과정이 구성될 정도로 실험실습에 주안점을 둔 것으로 분석된다. 학년당 학기는 3학기였으며, 1학기는 4월 1일∼8월 31일, 2학기는 9월 1일∼12월 31일, 3학기는 1월 1일∼3월 31일이다.

Number of classes per week of Busan high fisheries school(1941)

부산고등수산학교 세칙에는 “실습은 본교 소속 실습선 또는 기타 선박 및 학교장이 정한 장소에서 행한다”고 되어 있다(NFUP, 1991). 실제로 부산고등수산학교에 어로학과(1941년)가 개설된 이후 청진에서 정어리 건착망어업실습(1942년), 동지나해 트롤어업실습(1943년), 나가사끼 정치망어업실습(1944년)이 이루어졌다(PKNU, 2012).

1944년 부산고등수산학교의 규정에 의하면 어로학과, 제조학과, 양식학과의 각 학년별 매주 교수시수가 44시간으로 수업시수가 증가하였다. 그리고 어로학과 4학년은 전 학년 간 대부분 실습선에 승선시켜 어로학, 항해학 및 운용학실습을 하도록 하였다(PKNU, 2012).

이것으로 보아 어로학과에서는 원양어업이나 해기면허와 관련된 교과에 주안점을 두고 실험 및 실습교육이 이루어졌다고 분석된다. 한편, 양식학과는 어구학, 해양어장학, 연안어업론 등 어로와 관련된 과목을 신설시켜서 기르면서 잡는 어업으로 교육의 방향을 시도하는 측면이 보인다. 아울러 어로학과와 양식학과에서는 1944년부터 교육과정에 수산자원학이라는 과목을 추가하였는데, 이것으로 보아 단순히 키우고 잡는 어업뿐만이 아니라 수산자원에 대한 의미 있는 교육이 시작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진 수산자원 관련 교과 과목의 시초로서 단순히 잡는 어업이나 키우는 어업에서 수산자원에 대한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교육의 시도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3. 시련기: 부산수산전문학교로의 전환

1944년 부산고등수산학교에서 부산수산전문학교로 개칭되면서 어로학과는 어로과, 제조학과는 제조과, 양식학과는 어업증식과로 바뀌었고, 원양어업과가 신설되었다(NFUP, 1991). 양식은 수해양 생물을 키우는 것이지만, 증식은 수해양 생물의 개체 수를 늘리거나 키우는 것을 모두 포함한다. 이것으로 보아 당시 수산자원의 중요성을 조금씩 인식하게 되는 것으로 분석된다.

원양어업과의 수업연한은 1.5년이고, 나머지 과는 4년이었다. 원양어업과는 어로과 또는 동등 이상의 학력자가 입학할 수 있었는데, 이들은 입학과 동시에 해군으로 편입되며, 졸업 시 해군 소위로 입관되었다(KRIVET, 1998). 원양어업과의 이와 같은 규정은 전쟁 말기의 비정상적인 교육과정이 교육기관에서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부산수산전문학교의 어로과, 제조과, 어업증식과 연간수업시수는 각 학년당 1,477이었으며, 연간실험시수는 <Table 2>와 같다(NFUP, 1991). 실험 및 실습 시수가 전체 시수의 약 21%∼51%로 부산고등수산학교 시절보다 실험실습에 더 주안점을 두고 교육과정이 운영된 것으로 분석된다.

Number of experiments classes per year of Busan fisheries specialty school(1944)

한편, 원양어업과는 교내외실습이 약 1년간 이루어지도록 교육과정이 구성되었다. 수산계 학교에 필수적인 최초의 실습선은 1944년에 건조된 60톤 160마력의 경양환이었다.

1944년 당시 학생 수(괄호:한국인)는 어로과 139(7), 제조과 130(23), 어업증식과 56(19), 원양어업과 109(2)이었다(NFUP, 1991). 한국인 재적생의 수는 약 11.8%였다. 이는 부산고등수산학교의 한국인 입학생 비율인 28.8%(1941년), 1943년(15.8%)보다 점점 더 줄어드는 비율이다. 이것으로 보아 당시 민족차별, 수산에 대한 낮은 인식 등으로 인해 한국인의 고등교육으로의 참여가 힘들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전원 일본인으로 구성되었던 교수진과 대다수의 일본 학생들이 일본으로 떠났다. 그들은 농림성 수산강습소 시모노세키 분소에서 다시 교육을 시작하였으며, 이는 오늘날 시모노세키 수산대학이다. 시모노세키 수산대학과 부산수산대학교는 이후 1990년부터 자매결연을 맺어 현재까지 수산 관련 연구 자료와 정보 교류, 학술교류를 수행하고 있다.

광복 후 서서히 교수진과 학생의 모집이 이루어지던 중, 1945년 11월 10일 부산에 있던 미군 중 일부가 부산수산전문학교 교사에 주둔하게 되었고, 학교는 휴교상태에 놓였다. 이러한 상황을 틈타 부산수산전문학교의 인천 이전 운동이 대두되었다. 이에 부산시민들이 1945년 12월 3일 제7초등학교(부산 동광초등학교)에서 인천으로의 이전을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궐기대회를 열었다. 학교측과 부산시민들의 노력으로 1945년 12월 13일 이전 문제는 백지화되었다.

이러한 와중에도 1945년 11월 5일 학생모집을 위한 입학시험이 실시되었고, 그 결과 어로과(50명), 제조과(34명), 증식과(32명)에서 총 116명이 선발되었다. 이때 원양어업과는 학생모집을 하지 않았으며, 광복 이후 어업증식과는 증식과로 바뀌었다. 학교 건물의 징발, 부산수산전문학교의 인천 이전 운동 등과 같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드디어 1946년 1월 11일 개교식과 입학식이 이루어졌다(NFUP, 1991). 광복 후 부산수산전문학교의 교과목은 광복 이전과 비교해 볼 때, 교과목의 수가 대폭 축소된 것이 특징이다(<Table 3>). 광복 이후 수산교육은 관존민비, 인문숭상의 풍조, 기술인을 경시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의해 산업계의 수요가 고려되지 않고, 교육 시설이나 교원 확보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과 계획도 없었으므로 내실 또한 없었다.

Number of classes per week and subject of Busan fisheries specialty school(1945)

또 하나 특이한 사항은 광복 이전에 매우 활발히 수행되었던 실험과 실습과목도 없어지고 자료상으로 실험실습은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釜山水專生 各漁場에서實習: 부산수산전문학교에서는 종합대학반대하고저 결성된자치회에서는 1일부터강원도, 경남북의 각지어장으로실습을 나아가게되엇다...(중략)...(Dongailbo, 1946.08.02.).
 * 최대한 원문대로 옮겨 적음

하지만 위 기사에 의하면, 부산수산전문학교에서는 종합대학 설립을 반대하기 위하여 결성한 자치회에서 강원도, 경상남북도의 어장에서 이루어졌던 실습내용이 보인다. 이와 같이 학생들이 자치적으로 실습을 수행한 것으로 보아 광복 이후 그 당시의 학생들은 학생자치회에서 스스로 수산 관련 실습을 수행함으로써 수산 관련 실습교육의 맥을 이어간 것으로 보인다.

4. 성장기: 부산수산대학교로의 길

일본인이 철수한 이후 수산업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어선이나 어업 자재도 필요하였지만, 이에 못지않게 필요하였던 것이 고등 수산기술인의 배출이었으므로 이에 대한 수산교육은 필수적이었다. 이를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미군정청은 현장의 소리를 무시하고, 종합대학교의 설립을 확정하였다. PKNU(2012)에 의하면 1946년 5월 15일 수산학부와 인문학부를 두는 부산대학이 설립되었고, 기존의 부산수산전문학교를 이 대학의 수산학부로 개편되었다.

하지만 부산수산전문대학 교수들은 부산수산전문학교는 오직 수산인력을 양성하기 위하여 설립되었으며, 인문계대학이 병설되면 수산학도 고유의 기질이 둔화되어 수산교육기관으로서의 개성이 말소될 수 있으므로 미군정청의 계획에 반대하였다. 교수들뿐만이 아니라 학생, 동창회원들이 종합대학 설립 반대 운동에 동참하였다.

朝鮮唯一의 釜山水專 綜合大學에編入을反對: 부산수산전문학교는 이번에학재변경을기회로부산종합대학으로편입되게되었는데 이에대하야동교학생들은물론 교수진일동은 수전은독자적인학교로존속시켜달라고 열열히 대학편입반대하는운동을이르키고 있다. 그리하야반대진차로서울에온교수단, 동창회대표단은 지난 二十八일 문교부에 진정서류를내노코 교섭하는 한편 각 방면으로편입반대운동을 일으키고있다(Dongailbo, 1946.06.04.).
 * 최대한 원문대로 옮겨 적음

1946년 8월 22일에 미군정법령 제102호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에 관한 법령의 일환으로 부산대학이 국립부산대학교로 개칭되고, 수산과대학과 인문과대학으로 변경되었다(PKNU, 2012). 이로써 부산수산전문학교 내에 수산과대학과 인문과대학이 병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부산수산전문학교는 국립부산대학교 수산과대학이 되어 대학으로 승격되는 대신에 수산교육기관으로서의 독립성은 상실되고 종합대학의 단과대학이 되었다.

신교육제도의 실시에 따라 1946년 12월 15일부터 수산과대학이 실질적으로 종합대학에서 분리되어 독립된 단과대학으로서 학교를 운영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수산과대학의 명칭은 부산수산과대학으로 자체적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제도적 개정도 없이 이러한 것이 가능했던 것은 국립부산대학교의 직제조차 제정되지 못하고 있었던 미군정하 과도기에 있어서 문교 행정의 난맥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1947년 12월 10일, 어로과는 수산물리학과, 제조과는 수산화학과, 어업증식과는 수산생물과로 변경되었다(NFUP, 1991). 수산과대학의 전신인 부산수산전문학교는 일본인들이 설립한 학교인지라 학과 내용도 전문학교식 학과를 그대로 답습하여 기술훈련이 주로 되어 있었고, 심오한 학술연구의 학과 체제가 마련되지 못하였으므로 학과 명칭을 바꿀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교과과정의 특징은 선택과목이 없고 모두 필수과목으로 이수를 해야 하며, 전체적으로 교양과목의 비중이 작고 전공과목의 비중이 컸다. 그러나 1944년에 생겼던 수산자원학은 사라졌고, 1947년부터는 국문학과 문화사가 공통과목으로 추가된 것으로 보아 광복 이후의 우리말과 역사에 대한 시각이 생겼다는 것은 의미 있는 특징이다. 그러나 수산교육의 측면에서 볼 때 수산자원학이 사라졌다는 것은 그 당시의 현실에 적응하기 위한 생산과 채취의 1차원적인 측면이었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분석이 된다.

이수 시간에 대한 자료가 없어서 알 수는 없지만, 교과과정 상으로 볼 때 실험 및 실습은 일제시대에 비하여 줄어들었으며, 논문시험 합격자에 대하여 수산학사의 학위를 수여하였다.

1948년 12월 문교부는 부산대학을 문리과대학과 상과대학으로 재편성하고, 부산수산과대학을 편입시켜 3개 단과대학으로 구성된 종합대학을 만들려고 하였다(PKNU, 2012). 이에 부산수대 교수들은 민주교육 시책과의 배치, 수산교육의 중요성, 수산교육의 특수성, 시설 부족 등의 이유로 종합대학 편입 반대에 대한 진정서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러한 부산수대의 반대 운동에 호응하여 많은 수산업자들도 반대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그 결과 부산수대는 단과대학으로서 수산교육 건설에 노력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1949년 수산경제학과의 신설은 의미 있는 일이다. 수산생산활동의 목적이 이윤 추구를 위한 경제활동임이 인식되기 시작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이는 수산업과 수산교육의 발전을 위한 수대 측의 학과 증설 의지가 표현된 것이다. 1949년 교과과정(NFUP, 1991)을 보면 1942년 생겼다가 사라졌던 수산자원학이 다시 4개 학과의 교과과정에 나타났으며, 1954년 선택과목에 교육학이 처음 등장했다는 것은 수산교육에 있어서 의미 있는 일이다. 1951년 11월 29일 부산수산과대학을 부산수산대학으로 개칭하였다.

1954년 10월 부산수산대학에 대학원이 설치되었다. 이로 인해 수산학을 보다 심도 있게 연구하고 교육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된 것이다. 석사 과정으로 수산물리학과, 수산화학과, 수산생물학과, 수산공학과, 수산경제학과가 개설되었다. 박사과정으로는 1957년부터 수산물리학과, 수산화학과, 수산생물학과, 수산공학과, 수산경제학과가 개설되었다. 석사과정 보다 박사과정 학생의 인원이 더 많았는데, 그 이유는 그 당시 박사학위를 미소지한 교수진에 대한 교육이 필요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대학원 개설 이후 2년 반 정도 지난 1957년 3월 25일에 우리나라 수산교육기관에서 최초로 3명의 석사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어로학과는 주로 어로실습 및 항해운용실습을 하였다. 1953년 아직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건착망어업실습을 한 점, 1957년에는 대만까지 원양어로·항해실습을 한 점 등은 수산교육 실습에 있어서 의의가 크다. 1962년 3월 1일 문교부는 부산수대 교수와 학생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산수산대학을 부산대학교 수산대학으로 통합시켰다. 어로학과의 실험 및 실습은 전 교과과정의 50%를 차지하며, 연안어업실습, 근해어업실습, 원양어업실습 등을 하였으며, 1963년에는 원활한 실습을 위하여 600톤급의 실습선 건조를 위한 예산을 확보하기도 하였다.

1963년도부터 수산대학 분리를 요구하는 학생과 교수들의 요구가 높아졌으며, 마침내 1963년 9월 9일 부산수산대학이 부산대학교에서 독립되었다. 학교정비기준령 제9조에 의하면 교육내용이 특수하여 대학교의 단과대학으로 운영하기에는 곤란하다고 인정되는 대학은 예외로 한다는 단서 규정이 있음에도 그 당시 문교부는 수산대학을 부산대학교에 통합시켰다가 다시 분리 시킨 것으로 보아 문교정책이 일관성과 체계성이 없었으며, 이는 당시 사회적인 불안정 상태를 반영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1963년 부산수산대학 학칙에 의하면 수산경제학과를 수산경영학과로 학과명 변경, 어로학과의 2코스제(원양어업전공, 어업물리전공)로의 개편, 수산교육학과와 어선기관학과가 신설되었다. 담수어 양식실습을 위한 양식장 교내 설치(1961년), 실습선 백경호 건조(1964년), 수산가공 실습공장 준공(1967년)으로 학생의 교육실습과 연구가 활발해졌다(NFUP, 1991).

전쟁과 혼란으로 이어진 1960년대까지의 혼란기를 거쳐 1970년대에 이르러 부산수산대학은 정체의 늪에서 벗어나 성장을 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양적인 면에서 학과의 증설이 있었다. 당시 실시되었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인해 각 분야에 고급인력이 절실히 요청되었다. 이에 수산교육과에 기관전공(1973년)이 증설되었으며, 해양환경학과(1975년), 냉동학과(1978년), 박용기계공학과, 통신공학과, 자원생물학과, 해양공학과(1979년) 등의 학과가 생겼다. 1960년대 말 6개였던 학과가 1970년대 들어서는 12개로 증가하였다.

이들 중 절반 정도의 학과가 학과의 명칭을 바꾸었다(<table 4>). 바뀐 이유는 전공 학문의 폭이 넓어지고 심화 되었으며, 학문의 경향이 바뀌거나 사회·문화 환경의 변화에 기인한 것으로 분석된다. 한편 이 시기는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인해 고도의 산업사회를 이끌어 나갈 고급인력의 수요가 요청되었으며, 이에 부응하기 위해 관련 전공학과가 대학원에 증설되었다. 1960년대 말까지 대학원에서 수여할 수 있는 학위는 수산학석사/박사뿐이었으나, 기관학과(1973년), 해양환경학과(1978년), 식품공학과(1979년)에 공학석/박사, 수산경영학과는 경제학석사(1979년)/박사(1973년)를 수여하였다(NFUP, 1991). 이와 같이 학문 영역이 심화되고 확대되는 변화를 학위의 명칭 변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Rename department

1960년대 말까지 수산대학이 보유하고 있던 실습선은 홍양호, 백경호, 자산호가 있었다. 1977년 최신 장비로 구축된 새로운 대형 실습선 새바다호로 인해 실습 일정의 여유가 생겼으며, 기존의 어로학과와 기관학과의 분리된 실습 패턴으로 인한 실습교육의 효율성과 체계성이 개선되었다.

1960년대의 수산대학의 교육과정은 큰 변화가 없었지만, 1976년 실험대학으로 선정되면서 1977년부터 전공과목 교육과정에도 변화가 생겼다. 종전에 비해 필수과목이 대폭 감축되었고, 선택과목의 확충이 이루어졌다. 이는 학문 영역 간의 상호 개방을 도모한다는 실험대학의 대원칙 때문이었다. 1972년부터 수산계 단과대학이라는 특수성을 고려하여 어업, 식품공학, 증식, 수산경영, 기관, 해양환경, 수산교육과 등 7개 과를 묶어 수산계 단일계열로 학생을 모집하였다. 하지만 1978년부터 냉동학과를 비롯한 학과가 증설되어 학과 수가 총 12개로 늘어났다.

1986년 전국에서 최초로 대학편제를 준종합대학체제인 학부제로 개편하여 수산해양학부, 이공학부, 사화과학부로 구성하고, 종합대학으로 승격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80년대 부산수산대학의 최대 역점사업은 종합대 승격이었으며 교수와 학생들이 승격 운동을 전개한 이유는 당시 사회가 단과대학보다는 종합대학을 선호하는 경향이었으므로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기 위함이었다. 종합대학보다 단과대학으로서의 예산이나 학사 운영의 불이익, 취업의 불이익 등의 이유도 있었다. 수산·해양과학 분야의 특성화대학으로서 기능 강화를 지속적으로 요구하던 차 1989년 10월 28일 종합대학교로 승격하였다.

학부 15개 학과(1980년)에서 종합대학이 된 1990년에는 학부 29개 학과, 대학 재학생 수는 1,753명(1980년)에서 4,652명(1990년)으로 2.63배 증가하였다. 교수 수는 63명(1980년)에서 196명(1990년)으로 3.1배 증가하였다. 10년간 학과 신설, 교수와 학생 수가 수적으로의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진 것이다(NFUP, 1991).

1980년대 원양실습은 강의실에서 배운 이론을 실습을 통하여 익히고 응용하여 해기원으로서의 직무를 습득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원양실습 루트는 동남아 일원을 순항하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었다. 당시 유엔 해양질서법의 제정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수산해양교육 강화를 통한 국제해양 진출이 중요한 과제로 대두되는 시기였으므로 이에 맞추어 수산해양계 교육을 강화하고 해상교육의 질적 향상과 수산 관련 교육내용의 진전이 이루어졌다.

5. 재도약기: 부경대학교 수산과학대학

수·해양 분야의 특성화 중심대학인 부산수산대학교와 기술·응용 분야의 특성을 가진 부산공업대학교는 서로 비교 우위에 있는 수·해양분야와 공업 분야를 상호 보완 및 강화함으로써 대학의 세계화와 교육 시장 개방에 따른 급격한 교육환경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국제 경쟁력을 갖춘 대학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시대적 인식을 공동으로 가졌다. 이에 1996년 7월 6일 두 학교는 통합하여 부경대학교로 재도약하게 되었다.

대학은 단순한 사실이나 지식만을 전수하는 장이 아니라 활발한 지성의 개발을 통하여 시대적 변화를 선도하는 터전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대학의 내적 요구와 전문적인 훈련을 통해 세계화, 정보화에 앞장서지 않으면 점차 가속화되어 가는 교육 시장에서 설 자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외부 요인으로 작용하여 새로운 종합대학교인 부경대학교를 출범시키는 배경이 되었다. 통합으로 인하여 수해양 분야와 공학 분야의 접목으로 특성화를 이루며 수해양 분야는 세계적으로 연구 중심이 되도록 육성한다는 목표 아래 수해양교육이 이루어졌다. 2000년대 들어서는 연구 중심의 특수목적 분야 인재 양성을 위하여 수산해양 분야를 특성화 분야로 중점 육성하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1996년 16,976명이었던 재학생이 2015년에는 26,509명으로 증가하였다(PKNU, 2016). 승선실습은 해양의 자원개발과 환경 보전 등 해양과학 분야의 전문인력을 양성하고, 미래를 선도할 특성화된 지방대학으로 대학경쟁력을 강화하는 특화프로그램이다. 2004년부터 가야호, 탐양호, 2015년 9월부터는 나라호를 포함한 3척으로 승선실습이 이루어졌다. 수해양종합실습센터는 실습생들의 해양관측 실무 적응력을 배양하고, 해양과 관련한 종합연구조사를 수행함으로써 특수목적대학에 맞는 수해양교육을 내실화하고 있다, 국가기술자격시험장 인증기관으로서 관련 시설 및 장비 등을 지원하여 수산인적산업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2008년부터 특성화 사업을 위한 학과 단위의 특성화가 진행되었다. 스마트해양수산융합미래인력양성사업에 해양바이오신소재학과, 식품영양학과, 해양스포츠학과 등 15개 학과가 융합하여 학과의 역량 및 경쟁력 제고를 통한 대학경쟁력 강화를 꾀하고 있으며, 자율적인 학과 내부 프로세스 개선을 통한 고품질 교육 서비스를 공급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여기서는 산업체 취업을 목표로 하는 ‘현장실무형 인력양성’, 대학원 진학 후 연구 분야 취업을 목표로 하는 ‘미래연구 인력양성’, 공직 진출을 목표로 하는 ‘정책리드 인력양성’의 3트랙으로 나누어 차별화된 수산교육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2020년 기준, 부경대학교 수산과학대학은 식품공학과, 해양바이오신소재학과, 해양수산경영학과, 수해양산업교육과, 자원생물학과, 식품영양학과, 생물공학과, 수산생명의학과, 해양생산시스템관리학부(해양생산학전공, 해양경찰학전공)로 구성되어있다(PKNU, 2016).

우리나라 수산·해양산업의 발전을 선도해 온 수산과학대학은 그동안 수많은 수산·해양과학 전문 인재를 배출하였고, 이들은 일찍부터 정부의 수산·해양 행정 및 정책 입안을 주도할 뿐만 아니라 전국의 수산·해양관계 대학 및 연구소에서 교수 또는 연구원으로서 활동하고 있다. 이처럼 부경대학교 수산과학대학이 우리나라 수산·해양산업의 발전과 그 맥을 같이 하면서 해양생명과학을 포함한 수산·해양특성화 대학으로서 21세기 수산·해양과학의 미래를 짊어지고 인류 미래의 해양산업시대를 열어갈 도전과 개척 그리고 창의적인 능력을 갖춘 수산인재의 양성을 위해 교육하고 있다는 것은 수산교육의 측면에서 의미 있는 일이다.


Ⅳ. 결 론

시대적 상황과 경제, 문화, 교육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한국과 일본은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계이며 수산교육 또한 수어지교의 관계이다. 이에 수산교육의 이식과정과 발전과정을 통한 단계별 문제점과 극복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나라 미래 수산교육을 방향을 찾고자 한다.

먼저, 우리나라 수산교육의 시작은 일제 강점기 초기(1910년대-1930년대) 일제에 의한 수산교육의 이식이다. 1900년을 전후하여 한국의 수산업을 발달시켜 준다는 명목하에 일본인에 의한 수산자원의 조사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朝鮮海視察報告(1892년), 朝鮮通漁事情(1893년), 韓國水産誌(1908년-1911년) 등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조사에 투입된 사람들이 대일본수산회에 의해 만들어진 수산전습소와 수산강습소 출신들이었으며, 그들은 1910년대 우리나라 간이수산학교나 전습소, 강습소의 수산교육과 수산 관련 행정기관에 근무하기도 하였다. 일제하의 수산교육은 우리나라의 필요에 의한 교육이 아니라 일제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의 수산물을 어획하기 위한 수산기능인의 양성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수산교육은 자생적으로 발생된 교육이라기보다는 그 당시 역사적인 시대상의 반영을 통해 자연스럽게 일본에 의해 우리나라에 이식되게 되었다.

다음으로 우리나라 고등수산교육의 발전과정(1940년대-현재)에 대한 탐색은 최초의 고등수산교육의 발자취를 찾는 것으로부터 수행되었다. 발전과정의 탐색은 태동기, 설립기, 시련기, 성장기, 재도약기의 5단계로 구성하였다.

첫째, 우리나라 최초의 고등수산교육기관의 설립이 도청(1921년), 조선수산회(1925년), 총독부(1933년), 일본인(1936년)들에 의해 제안됨으로써 수산교육의 태동이 시작되었다. 도청과 조선수산회는 한국 수산교육의 보급과 발달이 목적이었으며, 총독부는 수산자원 수탈을 위한 한국의 수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고등전문학교의 설치를 주장하였다. 따라서 우리나라 고등수산교육기관의 설립운동은 내재적인 목표는 각기 다르지만 고등수산교육기관의 설립이라는 공동의 목적을 위해 전개되었다.

둘째, 우리나라 최초의 고등수산교육기관인 부산고등수산학교(1941년)가 부산에 설립되었다. 이 학교는 한반도 주변 해역의 수산물 생산량 확대와 수산자원 개발을 위한 전문가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어로학과, 제조학과, 양식학과의 3과가 설치되었으며, 이 3과는 이후 70여년 간 우리나라 고등수산교육의 주된 축으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강사진은 수산강습소 출신이 대부분이었으며, 학생도 한국인(28.8%)보다 일본인(71.2%)이 많았다. 키우는 어업보다는 잡는 어업에 대한 기초적인 수산교육이 이루어졌으며, 실험실습교육의 시수는 전체 교육과정의 약 24%∼35% 수준이었다.

셋째, 광복 전후의 시련은 수산교육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부산고등수산학교가 부산수산전문학교(1944년)로 개칭되었다. 광복이 되면서 교수진과 일본 학생들이 떠나고 우리만의 수산교육이 이루어지는가 싶었는데, 미군정에 의해 학교가 징발당했다. 이를 틈타 부산수산전문학교의 인천이전운동(1945년)이 발생하자 교수, 학생, 부산시민들이 합심하여 이를 저지하였다. 광복 이전에 활발하였던 실습과목과 실습교육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자치회를 통해 자체적으로 강원도와 경상남북도의 어장에서 실습을 수행(1946년)하였다는 점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따라서 이 시기의 수산교육은 관존민비, 인문숭상, 기술의 경시 등으로 교육시설이나 교원의 확보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없는 시기였지만 부산수산전문학교는 민·관·학이 합심하여 모든 시련을 견디어 냈다.

넷째, 일본인이 철수한 이후 수산업의 개발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였던 것이 고등수산기술인의 배출이었으므로 이에 대한 수산교육은 필수적이다. 이러한 학교현장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군정청은 현장의 소리를 무시하고 종합대학교의 설립을 추진하며 부산수산전문학교을 부산대학교 수산과대학(1946년 5월)으로 강제 편입을 시도하였다. 이후 부산수산과대학(1946년 12월), 부산대학교 수산대학(1962년), 부산수산대학(1964년), 부산수산대학교(1990년)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성장의 시기를 거치면서 부산수산대학은 수산경제학과(1949년)와 조선학과(1950년)의 신설, 대학원(석사과정:1954년, 박사과정: 1957년)의 설치, 수산교육과(1963년)와 어선기관학과(1968년), 자원생물학과(1979년)의 신설을 통해 우리나라 고급 수산인력의 개발에 기여를 하였다. 수산경제학과의 신설은 잡는 어업, 기르는 어업, 가공하는 기술에서 벗어나 이윤 추구를 위한 경제활동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광복 이후 경제발전을 추구하는 그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대학원 과정의 설치를 통해 수산학을 보다 심화하여 연구·교육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되었다. 수산교육과의 신설은 수산 관련 교사 양성의 필요성에 의한 것이었으며, 이로 인해 중등 수산교육을 위한 토대가 만들어졌다. 1960년대 수산업계에서 어선에 승선할 기관사 양성을 요청함에 이에 부응하기 위해 어선기관학과를 통한 기관사양성교육 실시 등 사회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산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1960년대 6개 정도의 학과가 1970년대 12개, 1980년 15개, 1986년 22개, 1990년 29개 학과 등 양적인 성장이 이루어졌다.

다섯째, 수·해양분야의 특성화 중심대학인 부산수산대학교와 기술·응용분야인 부산공업대학교는 수·해양분야와 공업분야를 상호 보완 및 강화시킴으로써 세계화에 따른 국제 경쟁력을 갖춘 대학으로 발전하기 위해 부경대학교(1996년)로 통합하였으며, 수산교육은 부경대학교 수산과학대학에서 재도약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통합으로 인하여 수해양분야와 공학분야의 접목으로 특성화를 이루어 수해양분야는 세계적으로 연구 중심이 되도록 육성한다는 목표 아래 현재까지 수해양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2020년 기준, 수산과학대학은 해양생산시스템관리학부(해양생산학전공, 해양경찰학전공), 식품공학과, 식품영양학과, 해양바이오신소재학과, 해양수산경영학과, 자원생물학과, 생물공학과, 수해양산업교육과, 수산생명의학과 등 8개 학과, 1개 학부(2개 전공)로 구성되어 있다. 1996년 16,976명이었던 재학생이 2019년 25,470명으로 증가하였으며, 2008년부터 학과 단위의 특성화를 통해 현장실무형인력양성/미래연구인력양성/정책리드인력양성 등 3트랙으로 차별화된 수산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부산지역에서 70년간 이루어진 고등수산교육에 대한 사적 고찰을 통해 미래의 수산교육을 위한 제언을 하고 한다. 첫째, 전통적인 수산학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재의 고등수산교육기관의 변화가 필요하다. 더욱이 70여년 간 어업학, 증식학, 제조학, 수산경영학 등이 주된 분야로 자리잡고 있으며, 학과 편제에서 이러한 분야들이 분화되거나 그 이름만 조금씩 바뀌었을 뿐이다. Kang(2019)이 보고한 것처럼 어업, 증식, 제조, 경영이라는 학문의 전체적인 틀은 변하지 않고 오히려 학문의 영역이 더 세분화 또는 심화 되는 양상을 보이며, 학문 간이나 교육 단계 간의 교류가 미흡하다. 융·복합을 지향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학문 간, 학과 간, 혹은 전공 간의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융·복합교육을 지향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둘째, 지금까지의 수산교육이 일본의 영향으로 인한 이식과정 후 시련과 혼란을 거친 자생적인 수산교육기관으로의 성장이었다면, 앞으로의 수산교육은 사회에 기여하고 사회에 환원할 수 있는 수산교육기관으로 거듭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한 방안 마련이 필요하다.

셋째, 21세기 오늘날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식량문제와 직결되는 수산자원의 보존과 이용, 환경오염으로 인한 해양환경 보존 등을 포함한 글로벌 차원의 거시적인 지속가능발전목표와 관련된 수산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Kang(2019)에 의하면 현재 수산교육 분야에서 전 지구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지속가능개발 목표에 부응하는 교육은 미흡하다. 이를 위한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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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1>

Number of classes per week of Busan high fisheries school(1941)

grade Piscatology Manufacturing Aquaculture
* ( ): Number of classes of experiments
1st 39(11) 39(13) 39(12)
2nd 39(08) 39(12) 39(10)
3rd 39(08) 39(14) 39(09)
4th 39(11) 39(17) 39(16)
total 156(38) 156(56) 156(47)

<Table 2>

Number of experiments classes per year of Busan fisheries specialty school(1944)

grade Fishery Manufacturing Multiplication
1st 420 455 455
2nd 385 385 315
3rd 315 420 315
4th 525 770 630
total 1,645 2,030 1,715

<Table 3>

Number of classes per week and subject of Busan fisheries specialty school(1945)

department N of classes/week subject common subject
piscatology 33 fishing gear, navigation, operation English,
German,
economics,
physics,
maths,
botany,
zoology,
general fisheries
Manufacturing 33 manufacturing, inorganic/organic chemistry
Multiplication 35 aquaculture, inorganic/organic chemistry

<Table 4>

Rename department

year before after
1971 piscatology(ocean fishery, fishery physics) fishery(ocean fishery, fishery physics)
fisheries education(piscatology) fisheries education(fishery)
Manufacturing food engineering
trawler organology organology
1979 ocean ecology ecology engineering
multiplication aquacul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