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Korean Society Fishries And Sciences Edu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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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JOURNAL OF FISHERIES AND MARINE SCIENCES EDUCATION - Vol. 34 , No. 2

[ Article ]
The 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for Fisheries and Marine Sciences Education - Vol. 34, No. 2, pp. 291-301
Abbreviation: J Kor Soc Fish Mar Edu.
ISSN: 1229-8999 (Print) 2288-2049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30 Apr 2022
Received 08 Feb 2022 Revised 10 Mar 2022 Accepted 17 Mar 2022
DOI: https://doi.org/10.13000/JFMSE.2022.4.34.2.291

융의 인간원형을 통한 상징적 삶의 구현 :이성대의 수필집 『한 살이 된 어른 아이』를 중심으로
강다연
동명대학교(강사)

Realization of Symbolic Life through Jung’s Human Archetype :Focused on Seongdae Lee’s Collection of Essays, 『A Adult Child of One Year』
Da-Yeon KANG
Tongmyong University(lecturer)
Correspondence to : minwooma@hanmail.net.


Abstract

Carl Gustav Jung is the founder of analytical psychology, who expressed an intensive interest in the process of human restoration.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analyze Lee Seong-dae’s essay, which reveals wisdom through exploration of human nature and abundant life, based on Jung’s theory, which proposed a philosophical methodology for human beings to live a valuable life. This is because Jung’s theory, which made an effort to understand the human mental world more fundamentally, has a point of contact with the fundamental task of the essay, the exploration of humanity. Seongdae Lee’s collection of essays, 『A one-year-old adult child』 is a work that clearly reveals the attitude and will of life to recognize and realize Jung’s human archetype and live a symbolic life. Human archetype in each work gives a deep insight into the wisdom of life and suggests a way to live a rich and meaningful life. This can have something in common with Jung's theory of pursuing a symbolic life that faithfully fulfills one's role. Through this Jung’s theory, it can be argued that Lee’s essays realize the true truth that sees through the world and embody a symbolic life. Therefore, it is thought that this thesis will contribute as a way to help the analytical psychological understanding of essays.


Keywords: Exploration of humanity, Human archetype, Symbolic life

Ⅰ. 서 론

모든 문학은 인간의 삶을 벗어나서는 완성될 수 없다. 그것은 문학이 정서적 감동을 원천으로 인간의 삶을 재구성하고, 보편적 이치와 지혜를 발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특히 수필은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을 통하여 인간성 회복이라는 중요한 과제를 실천하고, 나아가 자아성찰의 기회를 획득하는 데에 일조한다. 또한 급변하는 현대사회에서 상실되어가는 인간성 회복을 위한 장을 마련하고, 타인과의 조화로운 삶을 꿈꿀 수 있다.

카를 구스타프 융(C. G. Jung. 1875~1961)은 인간성 회복과정에 집중적인 관심을 표명한 분석심리학의 창시자이다. 인간의 마음을 논리성과 이성으로 환원시키려는 철학적 경향성을 거부하고, 자기실현 과정을 통해 유기체적 존재로서의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그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인류 공통의 행동양식인 원형을 집중 조명하고, 인간의 정신세계를 보다 근본적으로 이해하는데 노력하였다. 인간이 가치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철학적 방법론을 제기한 것이다. 융의 이러한 논의는 수필의 근본 과제인 인간성 탐구라는 접점 지점을 갖는다.

수필가 이성대는 인간 본질의 탐구와 풍부한 삶을 통한 지혜를 밝혀내는 데 크게 기여한 바 있다. 그의 수필집인 『낙엽의 미덕』(1992), 『한 살이 된 어른 아이』(2005), 『자유인』(2011)의 면면을 살펴보면 철학적인 삶의 가치와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또한 개인의 경험이나 사색을 보편적인 논리로 확장시킬 뿐 아니라, 사회 현상에 관한 비판을 통해 삶의 지혜와 철학적 메시지를 제시한다.

이에 수필을 통해 바람직한 인간의 삶을 제시하는 기존 연구를 살펴보면, 이상의 수필을 통해 지루한 감정이나 상황을 벗어나고픈 욕구와 인간 삶의 자유의지를 확인(Jeon, 2014), 백석의 수필을 통해 일제 강점기 외세의 억압으로 점점 사라져 가는 우리 민족의 정서와 정체성을 고수하려는 삶의 의지 제시(Huh, 2015), 김훈의 수필을 통해 유목적 삶과 자유의지, 내면적 삶의 깊이를 제시(Lee, 2017), 나혜석의 수필을 통해 근대적 여성 담론의 지향과 삶의 모순을 제시(Kim, 2018), 이양하의 수필을 통해 고독을 자유의 차원으로 승격시킨 발전을 제시(Kim, 2020), 김열규의 수필을 통해 자기 응시와 자기 탐색이 기반이 되어야 함을 강조(Lee, 2021), 전우익의 수필을 통해 인위적인 인간의 잣대를 배격하고 땀 흘려 살아가는 삶 속에서 각 구성원이 상부상조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운 생태문학적 삶을 제시(Son, 2021) 등이었다.

이와 같이 기존 연구들은 수필이 인간의 일상적인 삶을 통해 자아성찰의 기회를 획득하고 바람직한 삶을 제시한다는 연구가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인간의 삶을 인간성 회복과정에 집중적인 관심을 표명한 분석심리학적 연구는 전무하다. 이에 본 연구는 이성대의 제2수필집 『한 살이 된 어른 아이』를 융의 원형론과 상징적인 삶의 지향적인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본 연구의 구성은 먼저 융이 제시한 인간원형에 대해 알아본 후 이러한 원형 중 페르조나 원형이 이성대의 수필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에 대해 논의한다. 다음으로 융이 말하는 상징적인 삶과 작품에서 드러나는 작가의 견해에 대해 살펴본다. 이러한 융의 분석심리학적 논의를 통해 수필의 근본 과제와의 접점을 제시하고 이성대의 『한 살이 된 어른 아이』가 지향하는 삶을 모색한다.


Ⅱ. 인간 원형

융은 인간 정신의 전체성을 크게 의식과 무의식으로 구분하였다. 의식이란 자각하고 있는 상태를 말하며, 이 중심에는 ‘나(ego)’가 자리하고 있다(Murray Stein, 2015). 의식은 ‘나’가 중심이 되기 때문에 내가 알고 있는 세계라면 무의식은 내가 아직 모르고 있는 정신세계를 말한다. 이러한 무의식은 개인적 측면에서 주로 정감이 강조된 콤플렉스로 구성되어 있고 집단적 측면의 내용은 소위 원형들(archetypen)이다(C. G. Jung, 2002a). 원형은 시간과 공간, 지리적 조건, 인종의 차이를 넘어선 보편적 인간성의 조건으로 태초로부터의 체험의 침전이며, 그들이 지닌 원초상(原初)으로서의 성질을 말한다(C. G. Jung, 2002a).

이러한 원형은 그림자, 페르조나, 아니마·아니무스, 자기(Self)를 포함하는데 융은 원형을 통해 인간의 무의식을 들여다볼 수 있으며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과정에서 진정한 자신을 찾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C. G. Jung, 2002b). 그렇기 때문에 그림자, 페르조나, 아니마·아니무스, 자기(Self) 원형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먼저 그림자는 자신의 열등하고 부정적인 측면이다. 이는 개인적인 측면과 집단적인 측면에서 나타나는데 개인적 측면의 그림자는 다른 사람에게 투사될 때 나와 비슷한 부류의 나와 같은 성(性)에 투사되며 거기에서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Lee, 1999). 이때 개인적 그림자는 개인적인 열등감과 부정적인 어둠을 만들어 낸다. 한편 집단적 측면의 그림자는 어떤 지역, 국가, 사회, 이념, 시대정신 등 다양한 집단이나 집단의식에 의해 그림자 원형의 간여로 진행되는 집단행동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강렬한 감정으로 투사된다(Lee, 1999). 이때 집단적 그림자는 집단투사를 바탕으로 강렬하게 투사된다. 이렇듯 그림자의 투사는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열등감과 부정적 감정이 투사되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고 의식화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다음으로 페르조나(persona)는 본래 연극배우가 쓰고 어떤 역할을 나타내는 가면(maske)을 말한다(C. G. Jung, 2004). 이는 지역, 학력, 가풍 등과 같은 한 개인을 포장하고 있는 집단정신의 인위적인 단면이다. 우리가 흔히 ‘체면’, ‘낯’, ‘도리’, ‘본분’ 등의 말로 표현하는 집단적인 행동규범이나 사회적 역할이 여기에 해당된다. 다시 말해 페르조나는 고유한 자신의 개성이라기보다는 집단적인 특성을 통해 표현된 것으로 집단정신의 가면일 뿐이다. 이러한 페르조나는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데 도덕적 규범으로 작용하며, 인생 전반에 많은 영향력을 차지한다. 자아가 외부와 관계를 맺는데 있어서 페르조나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무조건 동일하게 여기거나 무시한다면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한 개인을 포장하고 있는 가면이라 할지라도 사회에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페르조나가 원활하게 기능해야 정신 건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아니마·아니무스는 남성의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여성상과 여성의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남성상을 말한다. 흔히 사람들이 이성에게 ‘첫눈에 반한다’는 것은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투사된 것이다(Lee, 2001). 이러한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제대로 발달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정적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지만 이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자신의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잘 관찰하고 의식화한다면 이를 통해 자신의 남성성과 여성성에 맞는 내적인격을 구별하게 되면서 정신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기(Self) 원형은 그 사람이 있는 그대로의 전부이며, 그 사람의 본성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 사람 자신이 되게끔 하는 것이다(Lee, 2005a). 융은 인간의 인격을 구성하는 대극적인 요소인 의식과 무의식, 자아와 자기, 페르조나와 아니마·아니무스를 통합하고 조절하는 근거를 자기라고 보았다(Yun, 2007). 그렇기 때문에 의식과 무의식의 통합을 통해 완전한 자기를 이룰 수 있다. 완전한 자기의 실현은 어렵지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식하는 노력이 동반된다면 자기실현의 단계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융이 말하는 그림자, 페르조나, 아니마·아니무스, 자기(Self) 원형은 무의식의 요소들이어서 인식하기 어렵지만 이들의 의식화를 통해 삶의 목표인 자기실현을 이룰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에 인간을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융의 인간원형이 수필 작품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페르조나 원형이 드러난 부분을 위주로 해석하고자 한다.


Ⅲ. 페르조나 원형과 삶의 실현

이성대의 수필집 『한 살이 된 어른 아이』 속의 단편 「인간의 복합성」은 사회의 모범상으로 살아왔던 B교수의 삶을 돌이켜보며 인생의 권태감과 무료함을 표현한 작품이다. 가장으로서, 지도자로서 한 치의 흠을 찾아볼 수 없었던 그들의 삶은 단지 사회에서 요구되는 모범적인 인간상이었을 것이다. 가족부양의 의무를 다하고, 지도자로서 학생들에게 모범과 신뢰를 제공해야하는 것, 그것이 인생 최대의 과제라 할 수 있다. 이 순간 사회 속에서 부여한 집단적 특성을 마치 자신의 전부로 여기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내막을 엿볼 수 있다.

B교수의 나이는 나와 동갑인데, A교수와는 달리, 담배도 술도 전혀 하지 않는다. 그는 철저한 근검 절약형(勤儉 節約型)이며, 따라서 장난 삼아나마, 술집에 발을 들여 놓거나, 허튼 수작을 한 적은 없는 사람이다. 그도 도덕교과서의 내용대로 살아가는 모범시민의 한 사람이라는 점에선 A교수와 다를 바가 없다. A, B 두 교수는 50이 넘은 나이이니, 말하자면 인생의 막장에 들어선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회적으로는 모범시민이요, 가정적으로는 모범적인 남편이요, 모범적인 아버지 노릇을 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들의 부인들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두 교수들은 인생의 막장에 들어설 때까지, 곁눈질 한번 하지 않고, 마누라에게, 가정에게 충실하였으니, 더 할 수 없이 고마운 존재들이다.
- 「인간의 복합성」 중에서 -

이 부분에서 융이 말하는 인간원형의 페르조나가 드러난다. 앞에서 말했듯이 페르조나는 한 마디로 사회적 역할로써의 가면이다. 그렇기 때문에 페르조나는 사회적인 삶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다. 「인간의 복합성」에서 드러난 페르조나는 사회적으로 모범시민이면서 가정적으로는 모범적인 남편, 모범적인 아버지 노릇의 가면이다. 이는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사회적 역할의 가면이면서 도리인 것이다. 그들은 그 도리를 충실히 이행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나 집단의 도덕적 규범과 사회적 역할에 맹목적으로 빠져들면, 허무감과 좌멸감에 빠져 우울증이나 각종 신체장애가 발생하는 경우가 있다. 많은 심리학자들은 사회 규범으로 인해 자신의 욕망을 억압할 때 정신적 병폐가 발생한다고 보았다.

우리는 사회에서 혼자서 살아갈 수는 없다. 우리는 생존의 필요상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고, 그래서 여러 가지의 복잡한 인간관계가 형성된다. 문명과 인지(人智)가 발달하면 할수록, 생존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인간관계도 더욱 복잡 미묘해진다. 우리는 저마다 필요에따라 사람들을 만나게 될 때, 자기의 본심을 그대로 들어내는 경우는 드물고, 그 때 그 때에 필요한 적당한 가면을 쓰고 대한다. 특히 이해(利害)관계가 얼켜있는 그런 문제에 있어서는, 서로가 더욱 두꺼운 가면을 쓰게 된다. 하루 종일 바깥에서 여러 사람들과 만나, 여러 가지의 가면을 쓰고 대하다가 보면, 어느 것이 나의 진짜의 모습인지, 모호해질 때가 자주 있다.
- 「인간성의 원형(原型)」 중에서 -

위 「인간성의 원형(原型)」은 손자와 할아버지라는 두 대상의 본능을 다룬다. 작가에 의하면 손자는 본능적으로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에게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는 어떠한 교육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는 본능 그대로의 상태, 인간성의 원형 그대로의 상태를 말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마음속에 원초적(原初的)인 원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작가는 손자의 사소한 행동을 보면서 생존의 문제로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사회를 떠나서 살 수 없으며 관계를 형성하고 살아가야 하기에 두꺼운 가면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가면을 두껍게 쓰다보면 나의 진짜 모습을 알 수 없다고 말한다(Lee, 2005b). 이는 바로 사회적 역할인 페르조나를 자아와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 사람들과 만나고 여러 가지의 가면을 쓰다보면 나의 진짜 모습이 어느 것인지 알기 어렵기 때문에 이를 구별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페르조나는 외부와 관계를 맺기 때문에 외적인격일 뿐인데 자아와 동일시하게 되면 정신적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이를 정신적 팽창(psychische inflation)이라고 한다(C. G. Jung, 2004). 자아와 페르조나를 구별하지 못하고 동일시하게 되면 오로지 사회적 삶이 자신의 목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결국 정신적 문제에 부딪히게 되고 신경증에 시달리게 된다. 사회적인 삶을 위한 가면은 자신이 교수로서, 가장으로서, 아버지로서 모범적으로 살아가야만 한다는 욕망일 수 있다. 이에 융은 자신의 욕망을 무의식의 창고로부터 의식의 장으로 발현시키는 일을 최고의 과제로 삼아야 한다는 당부를 잊지 않는다. 결국 이러한 가면은 ‘참다운 것’이 아니며 인간이 ‘무엇으로 보이느냐’하는 것에 관한 개체와 사회와의 타협의 한 소산일 뿐이다(C. G. Jung, 2004). 그렇기 때문에 페르조나를 무조건 자아와 동일시하기 보다는 제대로 인식하고 수용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는 수년 전부터 40대의 한 여인과 깊은 관계를 맺어오고 있었다. 그녀가 과부인지, 노처녀인지, 또는 술집에서 물러난 여인인지, 나는 아직 모르고 있다. 그는 그녀와 인연을 맺으면서 셋방을 하나 얻어 간소한 살림을 차려놓았으나, 이 사실은 극비에 부쳤다. 그래서 그의 동료교수들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부인, 아들, 딸, 며느리들도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 「하나의 해석」 중에서 -

하지만 사람들 가운데는 남의 시선에 급급하고, 인정의 의미를 최고의 과제로 삼는 사람도 있지만, 오직 자기 자신만을 상대로 사람의 참맛과 기쁨을 맛보는 인간형도 있다. 위「하나의 해석」의 A교수는 상식의 선을 넘어 강렬한 정념에 사로잡혀 쾌락을 맛보는 일에 흥미를 느낀다. 그는 60평생을 철학서적의 독서를 통한 형이상학적인 사색에서 삶의 보람과 기쁨을 느껴왔지만, ‘개인적인 삶’에 늘 목말라 했었다. 나아가 젊은 여인의 따스한 몸과 마음속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찾았을 수도 있다. 아니면 우리 사회의 질서와 법이라는 무거운 짐으로부터 발생한 부작용이었을 수도 있다.

이에 작가는 A교수가 남들의 시야 밖으로 나와서 자신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고독한 결단을 내렸던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Lee, 2005b). 인생 막장에 와서 남들이 평가하는 외형적인 성공에서 삶의 맛을 찾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진정한 욕망을 깨달았다고 본 것이다. 작가는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 앞에서 지식과 지혜가 힘을 쓰지 못했지만 상식의 잣대보다는 고독한 결단을 내린 A교수의 삶을 이해하려 한다. 작가도 융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인간원형을 제대로 인식하고 사회적인 페르조나와 자아를 구별하고자 결단을 내린 작품 속 인물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은 기계적인 생활이 끝없이 이어지는 무미건조하고 권태로운 나날의 생활에, 이런 자그마한 변화, 이런 맑고 순수한 웃음의 순간이 끼어든다는 것은, 생활의 권태감을 깨는 자극제가 될 뿐만 아니라, 무기력해진 의식(意識)을 재생(再生)시켜주는 하나의 신선한 활력소가 되기도 할 것이다. 사람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겠지마는, 생활의 단조로움이나 권태는 그 누구에게나 견디기 힘든 것이며, 그래서 사람의 의식 속에는 예외 없이, 새롭거나 신선한 것을 희구(希求)하는 마음이 도사리고 있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
- 「인간의 복합성」 중에서-

위 「인간의 복합성」에서 보면 기계적인 모범적 삶이 생활의 권태와 무기력으로 드러나면서 누구나 견디기 힘든 부작용으로 도사릴 수 있다고 언급한다. 이는 페르조나와 자아를 동일시하면서 사회적인 역할이나 도리가 참다운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문제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페르조나는 인간의 내면세계와 외부세계와의 관계를 맺는 요소라는 것을 제대로 인식해야 하며 진정한 자기실현을 이루기 위해서는 페르조나가 균형 있게 수용되어져야 한다. 이러한 융의 이론을 참작해볼 때 사회적 규범 속에 묶여 무미건조하고 권태로운 생활을 이어가기보다는 진정한 삶의 모습과 인간과 사회의 실상을 정확하게 바라보라는 작가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신 박사는 의사로서 마음만 바꿔먹으면, 적잖은 돈을 벌어, 안락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세속적인 자질구레한 재미도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신 박사는 의사들이 일반적으로 걸어가고 있는 세속적인 길을 버리고, 힘겹고 고독한 자기의 길을 택했다. 그것은 거듭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희생하지 않고는 절대로 걸어갈 수 없는 그런 길이다. 자기의 주변에 가지가지의 세속적인 즐거움들이 지천으로 널려있는데도, 그것들을 외면하고, 인간으로서 가장 외롭고 슬픈 처지에 놓인 사람들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지속적으로 주는 이런 행위는, 사람이 신(神)의 영역에 들어서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말을 바꿔하면, 신박사가 나환자들에게 준 사랑은 바로 신의 사랑과 동일한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신(神)이라는 말이 좀 어색하게 들린다면, 이 우주에 존재하는 가장 선(善)한 존재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 현세에서 한 사람의 연약한 인간으로 살면서, 신 박사는 신이 행하는 그런 숭고한 행위를 하였던 것이다.
- 「신정식 박사의 생애(申汀埴 博士의 生涯)」 중에서 -

위 「신정식 박사의 생애(申汀埴 博士의 生涯)」는 안과의사로서 소록도 나환자들의 안질환 진료를 담당한 신정식 박사의 헌신적인 일생을 다룬 기사를 바탕으로 쓴 작품이다. 신 박사는 마음만 먹으면 병원을 개업해 많은 돈을 벌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소록도에서 나환자들을 돌보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런 신 박사의 숭고한 행위를 작가는 그의 천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Lee, 2005b). 또한 ‘소록도의 슈바이처’, ‘나환자의 아버지’라는 칭송들이 그에겐 어색하고 곤혹스럽게 들렸을 것이며 그의 행위는 신이 행하는 숭고한 행위와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Lee, 2005b).

신 박사의 페르조나는 단지 일반적이고 세속적인 의사가 아니었다. 마음만 바꿔먹으면 안락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는 위치였지만 그런 가면을 버리고 힘겹고 고독한 자기의 길을 택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페르조나와 자아를 분명히 구별하고 진정한 자신의 삶을 실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지 남들에게 보이는 일반적이고 세속적인 의사로서가 아니라 세속적인 욕망을 버리고 헌신적인 사랑을 택한 신 박사는 자신의 페르조나 원형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실천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인생무대의 관객으로서 보다 더 뜻있고 조용한 재미를 맛보는 것은, 무대의 배우들의 고뇌나 허영 또는 어리석음을 통하여 인간의 약점 그 자체, 허점 그 자체를 몇 발짝 뒤로 물러서서 순 객관적으로 차분하게 관찰함으로써 거기에서 어떤 새로운 의미를 끌어내었을 때이다. 뿐만 아니라 남들의 허점이나 약점 또는 어리석음을 통하여 내 자신의 약점이나 어리석음을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어 조용히 관찰하고 정리하는 그런 기회도 가지게 된다. 다시 말하면, 인생 무대의 배우들의 온갖 작태를 눈여겨봄으로써, 내 자신의 내부도 객관적인 자세로 면밀히 관찰하고, 그래서 인간에 대하여 내 나름대로의 하나의 생각을 정리해보는 흐뭇한 순간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 「구경꾼의 재미」 중에서 -

위 「구경꾼의 재미」는 누구나 관중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는 화려한 주연배우가 되고 싶어 하는 소망과 그저 구경꾼으로서 살아가는 재미를 비교하며 인간이란 궁극적으로 어떤 존재인가, 인간의 참모습은 과연 속속들이 알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드러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고 칭찬 받고 싶은 욕망이 강렬할 것이다. 이러한 욕망이 지속된다면 인생이라는 무대의 주연배우를 자신의 페르조나라고 여기며 평생을 살아가다가 그것이 공기처럼 가볍고, 허망하고 공허한 명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경우에는 분명 정신적인 문제에 부딪치게 될 것이다. 이는 바로 자신의 사회적인 역할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인생 무대의 배우라는 가면을 썼더라도 몇 발짝 물러서서 객관적으로 자신을 관찰하고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고 말한다(Lee, 2005b). 이것이 바로 구경꾼의 자세이다. 인생 무대의 주연배우라는 페르조나와 자아를 무작정 동일시하기 보다는 이런 배우를 구경하는 구경꾼으로서의 자세를 가질 수 있는 안목과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신의 페르조나를 제대로 인식하고 자아와 구별한다면 구경꾼의 자리에 앉아서도 차원 높은 교훈과 지혜를 얻어서 삶에 대한 재미도 알게 될 것이다.

페르조나는 현대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사회와 관계를 맺고 적응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페르조나는 페르조나일 뿐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가면이지 가면 이면에 숨겨진 실재가 아니다. 주체는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남들에게 무엇으로 보이는가를 구별해야 진정한 자기실현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적 역할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보다는 자신의 내면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그것을 균형 있게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위 여러 작품을 통해 페르조나 원형을 인식함으로써 진정한 자신의 삶을 실현할 수 있다는 융과 작가의 견해가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Ⅳ. 상징과 상징적인 삶의 태도

융은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을 연결해 줄 수 있는 것을 상징으로 보았다. 상징은 인식하기 어려운, 미지의, 궁극적으로 결코 완전히 가늠할 수 없는 크기를 가리키는 무의식의 언어이다(C. G. Jung, 2001). 이러한 상징을 통해 무의식의 세계를 간접적으로 인식할 수 있으며 지금 무의식에서 요청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상징은 대단히 중요한 요소이다.

이러한 상징은 인간의 무의식을 들여다봄으로써 자신의 내면세계 또한 인식할 수 있는 요소이기에 현대인의 삶을 이해하는 바탕이 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융이 말하는 상징적인 삶이다. 융이 말하는 상징적인 삶이란 내가 다른 어떤 존재라는 것, 또한 그 속에서 내가 신성한 삶의 드라마에 나오는 배우 중 한 사람으로서 내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C. G. Jung, 2002a). 이것은 인생의 풍부한 경험을 통해 인생을 알차게 살아가려면 자기가 맡아서 하는 일,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 그 자체에 전력을 투입하여 사는 길이라고 말한 작가의 견해와 일치한다.

인생의 궁극적 결과는 성공한 사람에게나 실패한 사람에게나 모두 동일한 것, 즉 죽음이며, 죽는다는 것은 무(無)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그래서 한번 밖에 없는 이 인생을 진실로 즐겁게, 진실로 알차게 살려면 자기의 능력에 넘치는 일을 찾아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시간과 정력을 허비하지 말고, 자기가 맡아서 하는 일 그 자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삶 그 자체에 전력을 투입하며 사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 「인생의 나침반」 중에서 -

위 「인생의 나침반」에는 이러한 작가의 견해가 드러난다. 바로 융이 말하는 상징적인 삶과 작가가 생각하는 삶이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우리는 지극히도 일상적인 삶의 반복 속에 무료함과 권태감을 느끼지만 주어진 운명 앞에 신이 내릴 행운과 반전만을 기원한다. 그저 운명의 소용돌이에 자신을 내맡길 뿐 융이 말하는 ‘상징적인 삶’을 향한 도전에 무관심하다. 우리가 ‘우리를 괴롭히는 무섭고도 진부한 생활’을 견딜 수 없으며,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이라도 할 것이다(David Tayce, 2008). 그러나 삶의 진부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과 내면으로부터 끌어 오르는 욕망과 마주해야 한다.

작가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자기 나름대로의 확고한 생각이 서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Lee, 2005b). 자기가 맡아서 하는 일,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 그 자체에 전력을 투입하여 사는 길은 바로 융이 말한 ‘상징적인 삶’과 지극히도 닮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풍성하고 알찬 삶”이란 말을 곧잘 쓰고 있지만, 어떤 삶이 풍성하고 알찬 삶이라는 것을 속 시원하게 설명하는 일이란 그다지 쉬운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들은 저마다 가지고 있는 가치관의 차이에 따라, 삶을 보고 평가하는데도 많이 달라진다. 막대한 재물(財物)의 소유에 최고의 기쁨과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권력의 획득에, 명예나 명성의 획득에, 사랑의 획득에, 예술작품의 생산에, 새로운 지식의 획득에, 철저한 신앙생활과 불행한 사람들을 위한 봉사 활동에, 혹은 주지육림(酒池肉林)의 호탕한 생활이나, 목숨을 건 아슬아슬한 모험 등등에서, 최고의 기쁨과 행복을 맛보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쁨과 행복의 조건들은 우리 범인들이 모두 부러워할 지라도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그런 것들은 아니다.
- 「과거를 되살리는 기쁨」 중에서 -

작가는 우리의 행복은 곧 자신이 ‘인생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라 말하며, 우리는 늘 각자의 삶이 풍성하고 알찬 삶이 되기를 기원한다. 위「과거를 되살리는 기쁨」에서는 사람마다 기쁨과 행복의 조건이 다르며 그 조건들을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인간이 원하는 재물, 권력, 명예, 신앙, 봉사 등 각자의 행복 가치는 다르지만 값진 삶을 살기 위한 끊임없는 갈망은 결국 한 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삶의 행복은 우연한 기회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과 누군가의 말처럼 행운의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만 주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감나무에서 배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행복을 향한 끊임없는 갈망, 그리고 의지를 발휘할 때 찾아온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융이 말한 ‘상징적인 삶’은 쉽게 얻을 수는 없지만, 늘 우리 가까이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사람이 무엇을 자기의 것으로 가지고 싶어 하는 욕망, 그것도 필요한 만큼 적절히 가지려는 것이 아니라, 되도록 많이 가지려는 이 욕망을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막대한 재물 소유욕, 막강한 권력 소유욕, 찬란한 명예 소유욕 등등, 이런 것들이 강력한 자극제가 되어 인류의 문화와 문명을 발전시켜온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중략>
사람이 한번이면 끝나는 이 짧은 일생을 살아감에 있어, 무엇에다 최고의 가치를 두고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는 각자의 성향에 따라 정할 일이지마는, 진실로 내면의 자유를 얻어, 그 무엇에도 구속을 받지 않는 평온하고도 훤칠한 삶을 살아가려면, 이 재물욕의 집착에서 벗어나야만 가능할 것이다. 이것은 물론 지난(至難)의 일이지마는, 그래도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면, 그 집착에서 자유로워지려는 노력만은 꾸준히 해야 할 것이다.
- 「재산공개 파문을 보고」 중에서 -

위「재산공개 파문을 보고」는 국회의원들이나 고위공직자들의 재산공개 내용을 보고 인간의 ‘소유욕’과 연관지어 생각을 진술한 작품이다. 작가는 인간이라면 부인할 수 없는 재물 소유욕, 권력 소유욕, 명예 소유욕 등을 공직자들의 재산공개 파문을 통해 드러난 당연한 반응이라고 여겼다(Lee 2005b). 이러한 욕망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욱 확대되고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지극히 당연할 것이다. 그래서 현실 사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재물을 많이 가지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작가는 재물의 소유에 절대적인 가치를 두는 것은 허망하고 어처구니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Lee, 2005b).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욕망이지만 그 욕망이 과한 집착으로 이어진다면 인생의 막장에서 불행한 현실을 마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소유욕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소유욕의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작가가 말하는 것은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면 최고의 가치를 오로지 소유욕에 둘 것이 아니라 그러한 집착에서 벗어나야 하며 이를 위해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Lee, 2005b). 이는 융이 말하는 상징적인 삶과 상통한다(M. L. von Franz, 2018). 자신의 내면에 소유욕이 있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면서 그러한 소유욕에 절대적인 가치를 두지 않고,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이 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한다면 내 삶에서 내가 주인공인 알찬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에 와서는 우리도 이제는 삶의 질을 높여야 한다고 매스컴에서 떠들어대고 있다. 삶의 질을 높이는 데는 물질의 풍요만으로는 안 된다고 본다. 물질의 풍요에 못지않을 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의식(意識)의 개혁도 해야 한다. 낡은 고정관념은 미련 없이 버리고, 사물을 새롭게 보고 새롭게 해석하는 새로운 안목을 가져야 한다. 이 새로운 안목을 가지려면, 의식은 항상 맑게 깨어 있어야 한다. 의식은 잠을 자고 있고, 몸뚱이만 살아 움직이고 있는 산송장들에게는 새로운 안목이 절대로 싹트지 않는다. 이 새로운 안목을 가짐이 없이는, 인생과 세계를 신선하고 생기 있게 보지는 못한다. 인생과 세계를 신선하고 발랄하게 보지 못하는 사람의 의식 세계에는 항상 고정관념만 자리 잡고 있어, 그의 생활에는 생기와 재미가 없다. 그래서 그의 생활에는 언제나 무기력과 따분함과 지루함의 그림자가 깔려있는 것이다.
- 「다 타버린 담배꽁초」 중에서 -

위「다 타버린 담배꽁초」는 길을 가다가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는 담배꽁초를 보면서 사람들의 의식이 깨어있어야 한다는 작가의 생각을 드러낸다. 작가는 담배를 피우다가 꽁초를 아무렇게나 버릴 경우 일단 끄고 버리거나, 버린 후에 끝까지 불을 끄는 사람들은 그래도 의식이 남아 있는 사람이지만 불도 끄지 않고 그냥 던져버리는 사람들은 사고방식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 말한다(Lee, 2005b). 흔히 사람들은 담배꽁초를 버리는 행위를 무심히 반복한다. 이런 반복이 습관이 되어 버려 아무 생각 없이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의식이 깨어있지 않은 그저 잠자고 있는 상태라 할 수 있다. 이런 상태에서 무의식적으로 담배꽁초를 무심히 던지고 가버리는 행동으로 인한 피해는 산불로 이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점을 통해 작가는 담배꽁초를 버리는 행위에서부터 의식이 명료하게 깨어 있어야 하며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그 이상으로 의식의 개혁도 필요하다고 말한다(Lee, 2005b). 의식이 깨 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의식과 무의식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말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자신의 내면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의식과 무의식의 균형을 이룬다면 그것이 바로 질 높고 알찬 삶으로 이어질 수 있다. 담배꽁초 하나라도 함부로 버리지 않는 깨어있는 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의식의 개혁이 필요하며, 사소한 일이라도 새롭게 보고 해석하는 새로운 안목을 가진다면 삶은 무기력과 따분함과 지루함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작가의 태도와 의지가 바로 융이 말하는 상징적인 삶일 것이다.

나는 사람의 일생을 하우수먼 식으로 계산하여, 금년에 다시 태어나서 인간 세상과, 무한대로 넓은 우주를 앞에 두고 서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한 살의 아이의 머리 속에는 인간이 만든 어떤 관념이나 사상도 들어 있지 않다. 그것은 글자가 한자도 쓰여 있지 않은 한 장의 백지(白紙)와도 같다. 나는 요즘 나의 머릿속이나 의식 상태를 그런 백지상태로써 세상과 자연을 바라보니, 내 자신이 어린 아이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좋고, 내가 과거에 당연한 것으로 보아 넘겼던 평범하고 자질구레한 인간사들이 모두 신기하게 보이고, 내가 과거에 무심히 보았던 노변의 잡초의 모양새나 나무들의 모습들 하나하나가 경이로운 존재로서 나를 감동케 한다. 나는 특히 수목과 잡초가 우거진 산 속을 걸어갈 때는 눈에 띄는 어떤 나무, 어떤 잡초도, 과거의 눈으로 보지 않고, 백지상태의 어린 아이의 눈으로 보니, 그것들이 한없이 신기하게 보여 나에게 신선한 기쁨을 준다. <중략>
사람의 기질이나 성향에 따라 다르겠지마는, 나도 70의 고개를 넘고 보니, 몸도 마음도 무기력해지고, 어떤 것을 보아도 그저 덤덤하기만 하고, 그래서 하루하루의 생활이 단조롭고 권태롭고 따분하기만 하다. 이 단조롭고 권태로운 일상생활에서 벗어나려는 한 방편으로, 한 살짜리의 아이의 의식 상태를 가지고, 세상만사를 보며 노년의 세월을 보내려고 한다. 그렇게 하면 나의생활이 다시 어린아이의 생활처럼 유치하고, 활기차고, 발랄하여 재미가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 「한 살이 된 어른 아이」 중에서 -

위 「한 살이 된 어른 아이」에서는 작가가 살아온 상징적인 삶의 태도가 분명하게 나타난다. 작가는 인생의 풍부한 경험을 통해 알차게 살아왔기 때문에 70의 고개를 넘은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면서 한 살 어린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노년을 보내고자 하는 의지를 보일 수 있는 것이다(Lee, 2005b). 그것은 지금까지도 하루하루를 알차게 살아왔지만 앞으로도 어린아이처럼 활기차고 재미있게 살고자 하는 삶의 태도가 분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70이 넘었으니 인생을 다 했구나가 아니라 다시 한 살이 되어 새로운 삶을 살아갈 것이라는 삶의 태도와 의지가 분명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러한 작가의 견해는 융이 말하는 상징적인 삶의 태도와 분명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여러 작품을 통해 이성대 작가의 견해가 융이 말하는 상징적인 삶과는 다음과 같이 동일한 면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나 자신의 인생에서 내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면서 삶을 알차게 살아가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삶을 상징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며 바로 융이 말하는 상징적인 삶이다.


Ⅴ. 결 론

수필은 개인의 삶을 이해하고 자아성찰의 과정에서 삶의 이치와 지혜 등 인간의 총체적인 삶을 담는 그릇이다. 이로 인해 우리는 인간성 회복을 가능하게 하며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이룩할 수 있다. 각박해져가는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와 존엄성의 회복으로 인정받는 것이 바로 문학이다. 따라서 급변하는 현대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심리 상태를 점검하고 인간의 내면세계를 연구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본다.

본 연구는 융이 말하는 인간원형이 이성대의 수필에서 상징으로 드러나는 부분과 이를 통해 상징적인 삶을 지향하는 삶의 태도에 대해 논의해 보았다. 융의 원형론은 현대인들의 인간성을 회복하고 인간을 긍정적으로 이해하기에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Kang, 2018). 인간원형을 통해 자신의 무의식을 제대로 인식하고, 무의식을 의식과 통합함으로써 참되고 긍정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이성대의 수필에서 드러난 인간원형은 삶의 이치를 깊이 있게 통찰하고 풍성하고 알찬 삶을 살아가기 위한 길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 간의 균형을 회복하여 한 사람으로서 내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상징적인 삶을 추구하는 융의 이론과 상통하는 것이다.

작가는 사회적 규범 속에 묻힌 잠재된 가능성을 의식 밖으로 유인하여, 자신의 가능성의 토대로 삼는 삶의 태도를 분명하게 보인다. 단지 단순한 생활의 반성이나 느낌의 표현이 아니라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인생의 본질, 시대정신 등을 관통하고 있으며 세상의 모순을 깊은 통찰을 통해 바로 보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Lee, 2011). 이것이야말로 바로 상징적인 삶을 지향한다고 할 수 있다. 상징적인 삶은 대극의 합일, 즉 의식과 무의식의 통합을 이루면서 나아가 자신만의 개성으로 창조적 작업을 이어나갈 때 인생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이처럼 이성대의 『한 살이 된 어른 아이』는 융의 인간원형을 인식하고 실현하며 상징적인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삶의 태도와 의지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본 연구는 인간의 내면을 이해할 수 있는 융의 원형 이론을 통해 이성대의 수필을 탐구함으로써 수필의 분석심리학적 이해를 돕는 방안으로 기여할 것이라 판단된다. 그것은 수필을 통해 세상을 꿰뚫어 보는 안목과 삶의 지혜를 쌓게 되면서 상징적인 삶을 구현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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