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일본의 동해 해양조사의 숨은 배경과 과학적 의미
Abstract
This paper looks into the hydrographic survey of the East Sea conducted by the Japanese government in 1932 and explores its significance and implications, especially with regard to the Japanese policy to control the East Sea. The 1932 hydrographic survey was the largest one during the period of repressive Japanese rule of Korea. This survey was carried out by 50 survey vessels extending a wide area from Lat. 50°N near Sakhalin to Lat. 20°N near Taiwan. The total survey points amounted to 1,743 points. The survey vessels came not only from the Fisheries Experimental Stations in Japan but also from the Fisheries Experimental Stations of all the provinces in Korea. The main purpose of the survey was to explore the flow of currents and to search for the causes of the fishing fluctuations in the wide East Sea. The meaning of the 1932 hydrographic survey of the East Sea was that, unlike the partial surveys conducted before that, it was conducted in full scale with wide participation and collaboration of related government agencies. By examining the Japanese hydrographic survey of the East Sea in 1932 from a convergence perspective, we can have a better understanding regarding how much importance Japan has attached to the East Sea since the colonial period, the intention behind the Japan's unjust claim for Dokdo, and the various ways Japan mobilized to usurp the land and sea of Korea.
Keywords:
East Sea, Hydrographic survey, Fisheries experimental station, Uda, Usurpation, ConvergenceⅠ. 서 론
역사적으로 동해와 환동해는 다양한 갈등이 존재해 왔으며 현재도 여러 갈등이 존재한다. 이 갈등은 양자 혹은 다자간 갈등으로 구분될 수 있으며, 관련 요인에 따라 영토·영해, 자원, 환경, 군사전략, 교역,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고, 그 강도와 사회적 영향 또한 상이하다. 영토·영해 갈등이나 군사 전략적 갈등에 비해 해양수산자원 갈등은 과거보다 미래지향적 입장에서 매우 중요하면서도 일상적 삶과 깊은 연관성을 지닌다. 특히 동해에서 한·일간의 해양수산 자원과 그에 따른 해양 주도권 갈등은 직·간접적으로 동해 지명문제와 독도 영유권과 연결되어 있다. 해양수산자원 갈등의 경우, 갈등의 원인과 전개과정 분석을 통한 갈등의 해결 혹은 경감 방안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해양수산 자원의 학문 특성상 갈등의 역사적 배경 및 정치적 요소 등에 관한 인문사회과학적 시각과 해양수산자원의 요소 및 중요성에 관한 자연과학적 시각의 융합 연구가 요구되지만, 이러한 학문 융합적 연구 시도는 아직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불법 편입하면서 동해를 자국의 내해(內海)로 확장하여 자국민의 식량공급을 위한 수산물 공급지로서 어획량 증대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Dokdo Museum, 2002). 이를 위해 일본은 동해의 수산자원 개발을 위해 동해의 수산해양학적 조사를 실시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러한 동해 수산해양학 조사의 대표적 조사가 바로 1932년의 전면적인 동해 해양조사였다. 이러한 동해 수산자원에 대한 일본의 연구조사는 동해 수산자원의 지속적인 이용을 목적으로 1945년 이후에도 계속해 왔으며, 한편, 독도를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배경에는 이러한 연구조사를 바탕으로 동해를 ‘일본의 바다’로 만들려는 숨은 의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은 이미 일제강점기에 동해에 대한 해양조사를 수십 차례 실시했다. 그 중 최대 규모는 전국의 수산시험장이 참여한 1932년 춘계 조사였다. 이 조사는 북위 50도 사할린 지역에서부터 북위 20도 타이완 지역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을 50척의 조사선을 동원해 일제히 실시하였다. 조사 시기는 1932년 6월 1일부터 12일 사이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으며, 기본 해양조사 정점은 1,743개소에 달했다. 조사에는 일본 측은 물론 함경남북도·강원도·경상남북도·전라남북도·충청남도·황해도 등 조선 측 수산시험장 소속 조사선도 참여하였으며, 또한 조선총독부 직할 수산시험장도 3척의 조사선을 동원하였다. 이전에 단편적으로 이루어진 일본의 동해 해양조사와 다르게 1932년 조사는 동해에 면한 모든 수산관련 행정기관이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는 데 그 역사적 의미가 있다.
일본의 1932년 동해 해양조사 결과는 『수산시험장보고』 제5호(1934년 3월 발행)에 보고서 형태로 간행되었다. 이 논문에서는 동해 전역을 대상으로 한 사실상의 최초의 종합 해양조사라 할 수 있는 일본의 1932년 동해 해양조사에 대해 소개하고, 그 역사적 배경과 조사의 의미를 밝히고자 한다. 이를 통해 일본의 동해 해양조사에 대한 역사와 실태를 분석하고, 일본이 일제강점기부터 동해를 얼마나 중시해 왔는지 등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Ⅱ. 1932년 이전의 일본 해양조사 및 동해 해양조사 역사
메이지 유신 이후 시작된 일본의 근대적인 해양조사는 농상무성 수산국과 수산강습소가 중심이 되어 외국에서 도입한 기구 등을 모방하여 국산화하고, 나아가 자체 조사 장비 개발을 통하여 점차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기타하라(北原多作)나 마루카와(丸川久俊) 등에 의해 조사방법의 통일화도 시도되었다(稻掛伝三·鈴木秀彌·友定彰, 2013). 조사 방법의 통일은 다양한 기관에서 얻은 조사 자료의 일관된 해석 혹은 시간적으로 변화하는 해양의 변화 양상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한 필수 요소라 할 수 있다. 일본 및 조선측 수산시험장 소속 50척의 조사선이 동시에 동원된 1932년 동해 해양조사의 결과가 빛을 발했던 것은 그리고 이러한 동시 조사가 가능했던 것은 조사 방법의 통일화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수산 조사는 일본 농상무성 수산국에 의한 1887년의 이즈7도(伊豆七島)근해 어장 조사가 시초이다(稻掛伝三·鈴木秀彌·友定彰, 2013). 일본의 해양관측은 표층의 해류 조사를 목적으로 한 농상무성 수산조사소의 해류병 조사로 시작되었으며, 수심별로 해양의 특성을 조사하는 연직관측(鉛直觀測)은 1900년 수산국에 의한 사가미만(相模灣) 및 스루가만(駿河灣) 조사가 최초였다. 1900년부터는 일본 전국에서 5개소를 선정하여 년 4회에 걸쳐 정기적으로 해양조사를 수행하는 정점조사(定点調査)도 수산국에 의해 개시되었고, 1910년부터는 어업 기본조사로 발전하였다(稻掛伝三·鈴木秀彌·友定彰, 2013).
일본의 어업 기본조사는 “어업을 건전하게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해양과 수족(水族)의 상호관계를 분명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중요 수족의 생태, 해양의 이화학적(理化學的) 성상(性狀) 및 어황(漁況)을 다년간에 걸쳐 조사하여 그 자료를 종합 분석하고, 어업이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1909년의 기타하라(北原多作)의 제안을 농상무성이 받아들임으로써 개시되었다(丸川久俊, 1947). 이에 따라 전국 28개 수산시험장에 의한 정점관측이 정기적으로 이루어졌고, 수온 및 비중(比重)관측, 플랑크톤 채집, 어황 조사 등이 실시되었다. 이 사업은 1913년 수산국에서 농상무성 수산강습소로 이관되었고, 이를 계기로 18개소 등대를 활용한 정지관측(定地觀測)도 추가되어 1918년 3월까지 계속되었다. 1918년 4월 이후에는 이 사업은 해양조사 사업으로 발전하였다. 이 시대 일본의 수산연구는 일본 국민에게 안정적으로 식량을 공급하기 위하여 어획량 증대를 위한 연구였으며, 연안에서 원양으로 어장이 확대됨에 따라 고기를 잡을 수 있는 장소와 때를 어민에게 보급하기 위한 연구 조사였다. 이 과정에서 해양조사의 중요성이 대두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지속적인 해양조사의 유용성만이 주장되었고, 조사에 필요한 조사선의 건조 등 조사에 필요한 재원 및 기자재의 확보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丸川久俊, 1932). 1917년이 되어 해양조사 관계 예산은 어업조사 사업비에서 분리되어 새롭게 해양조사 사업비로 의회를 통과함으로써 해양조사 예산이 확충되어 1918년부터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선ㆍ타이완ㆍ사할린ㆍ홋카이도 등의 수산시험장과 35개 부현(府縣)에 의한 약 60개의 특정 라인을 따라 횡단하며 정기적으로 조사하는 정선(定線)관측이 실시되었고, 등대 등을 활용하여 약 90개소에서 정지관측이 시행되었다. 이러한 관측 자료들은 년 4회 3개월마다 발행되는 『해양조사요보(海洋調査要報)』을 통하여 결과가 공표되었다. 1919년 9월에 해양도(海洋圖) 제1호가 발행되었고, 또한 일본 주변의 수온 분포, 해황(海況), 어황의 속보가 매월간행되어 일본 어업인에게 제공되었다. 본격적인 해양조사 시행에 따라 특정 라인을 따라 정기적으로 조사하는 정선관측(定線觀測)과 모니터링 체제가 확충됨과 동시에 일본 최초의 해양조사선인 161톤급 목선 텐오마루(天鷗丸)1)가 건조되었다(稻掛伝三·鈴木秀彌·友定彰, 2013).
1929년에는 수산 시험조사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과학에 입각한 수산업 합리화 목표로 수산강습소의 시험부와 해양조사부로부터 농림성 수산시험장이 신설되었고, 해양조사의 확충과 함께 중앙과 지방 수산시험장간 업무 협조를 원활히 진행해 나갔다. 1930년부터는 전국적인 정기적 횡단관측(66개 정선에서 매월 1회 관측)과 연안 정지관측(99개소에서 매월 6회 관측)이 개시되었다([Fig. 1]). 조사 해역 또한 남사할린 부터 타이완 주변에까지 확대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932년 농림성 수산시험장에 근무하고 있었던 우다(宇田道隆, 1905-1982)2)의 지휘 하에 동해에 대한 일제(一齊) 해양조사가 개시되었던 것이다.
한국 근해 최초의 해양조사 활동은 1787년(조선 정조 11년) 프랑스 라페루즈(La Pérouse) 탐험대에 의한 우리나라 근해의 수심측량이랄 수 있다(Hahn, 1988). 라페루즈 탐험대는 마닐라에서 제주도와 대한해협을 거쳐 동해로 들어온 후 울릉도 인근 해역을 지나면서 동해를 조사한 후 캄차카로 이동하였다. 이 과정에서 라페루즈 탐험대는 우리나라 근해에 대한 수심과 해저 저질 상태를 측량하였고, 경위도를 측정해가면서 섬과 해안선의 형태를 파악하였다. 특히, 당시 그들이 보유한 해도에 없던 울릉도의 존재를 파악하고 섬을 발견한 천문학자의 이름을 따서 다줄레(Dagelet)로 명명하였으며, 서양에 울릉도의 존재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한국 근해에 대한 체계적인 해양조사는 1888년 러시아의 마카로프(S. O. Makaroff, 1849-1904) 제독의 비티아즈(Vitiaz)호 조사로부터 시작했다(Hahn, 2014). 마카로프는 33개월간(1886년 8월~1889년 5월)의 세계일주 항해 과정에서 대한해협을 횡단하며 수심 25m 마다 수온 및 해수 비중의 수직 변화를 조사하여 대한해협의 수온 및 해수비중 단면도를 처음으로 작성했다. 또한 한반도 동쪽 바다에서도 13개의 관측점을 조사하여 수심 400m의 수온이 0.4∼0.9℃임을 밝혔다. 이외에도 북위 32∼33도, 동경 129∼130도 해역에서 표면 수온의 계절변화를 조사하여 2월 중순에 최저수온 14℃, 8월 중순에 최고수온 29℃를 보고하였다(Hahn, 2014). 일본 해군 수로부는 마카로프가 조사한 동해 해저심도도(海底深度圖)와 추가 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해도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이후 동해 해양조사는 일본 수산강습소 해양조사선 텐오마루에 의해 기온, 기류, 해무, 표면수온 등이 조사되었고, 일본 해군 수로부 군함 야마토(大和)에 의해 표층에서 수심 1,000m까지 수심에 따른 수온 및 염분의 수평 분포도, 수색투명도, 용존산소량 분포 등이 조사되면서 동해 북쪽 해역에서는 한류수가 주로 분포하며, 동해 남부 해역에서는 대마난류수가 존재한다는 동해의 해수 특징 등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1928년 이후 매년 여름철에 실시된 일본 해양기상대 소속 조사선 슌푸마루(春風丸)에 의한 동해 조사도 『해양시보(海洋時報)』를 통해 보고되면서 동해의 개괄적인 해황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일본 수산시험장은 동해 전체에 대한 동시 조사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그 결과로 1932년 동해 해양조사가 실시되었다(Uda, 1934).
1932년 일본의 동해 조사는 각 지역 수산관련 관청의 대대적인 참여를 통한 광범위한 해구(海區)에 대한 해황과 어황 그리고 해수 유동의 전반적인 특징 등을 밝히는 데 목적이 있었다. 조사는 1932년 6월 5일을 기하여 일제히 각 관계기관이 연락하여 조사선 50척을 출동시켜 서로 제휴하면서 분담 구역을 정하여 집중적으로 실시하였다. 총 조사기간은 1932년 5월 5일부터 6월 26일(단, 황해도 수산시험장은 4월 2일 시행)까지였다. 조사 시기를 5∼6월로 선택한 이유는 1) 정어리와 고등어 등 동해의 중요 어족의 봄철 어황과 해황의 관계 파악, 2) 한반도 북부 연해, 동해 북부 및 중앙부의 해황 연구에서 5~6월 시기가 불분명한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이를 파악하기 위함이었다(Uda, 1934).
Ⅲ. 1932년 해양조사 내용 및 의미
1. 해양조사 개요
1932년 5~6월에 실시된 해양조사의 조사 구역은 북쪽으로는 사할린 서쪽 북위 50도에서부터 남쪽으로는 남중국해 주변의 북위 20도에 이르는 광범한 해역이었다. 조사 항목은 수심 및 저질분포, 수심별 해수특성(수온, 염분, 용존산소, 수소이온농도, 인산염, 질산염, 규산염), 수색(水色) 및 투명도, 기상 및 파랑, 해·조류와 조위(潮位), 어란(魚卵) 등 생물 채집 등 13개 항목이었다.
조사에는 조선총독부 직할 수산시험장 소속의 3척의 조사선과 함께 함경남·북도, 강원도, 경상남·북도, 전라남북도, 충청남도, 황해도 등의 조선 측 수산시험장 선박 등 총 50척의 선박이 참여하였다. 조사 기간 동안 1,734개 관측점에서 수심별 조사, 40개 정점에서 표층 해류 측정, 해수 염분검증을 위한 6,500개의 해수 채수, 표층 해류 측정을 위한 6,789개의 해류병 투하(1,729개 회수)가 실시되었다.
[Fig. 2]는 해양관측 정점의 위치와 횡단 관측선을 나타내고 있으며, [Fig. 3]은 동해를 집중적으로 조사한 농림성 수산시험장 소속 소요마루호(蒼鷹丸)의 관측점 및 관측점의 해저 수심을 나타낸다. 소요마루호의 경우, 1932년 5월 5일부터 6월 26일까지 53일간 약 7,400km에 걸친 항해를 통해 동해의 85개 관측점에서 수심별 조사를 비롯하여(최대 채수 수심 3,000m) 총 194개 지점에서 관측을 수행하였으며, 염분 검정용 채수 1,200개, 용존산소 검정용 채수 850개, 인산염, 질산염, 규산염 등 해수의 영양염 분석용 채수 630개, 표층 해류 측정용 해류병 투입 1,000개 등 동해해황을 분석하기 위한 샘플을 채집하였다.
2. 해양조사 주요 결과
해양 조사의 세부적인 내용은 조사를 주도적으로 이끈 농림성 수산시험장 해양조사부 기사인 우다(宇田道隆)에 의해 수산시험장 보고 제5호(1934년 5월 발행)에 보고되었다. 동해 전역에 걸친 최초의 종합조사라 할 수 있는 1932년 춘계 동해 일제 조사를 통해 동해 전역의 춘계 기온분포도 및 수심별(0, 10, 25, 50, 100, 150, 200, 300, 400, 500, 600, 800, 1000m, 해저면) 수온 및 염분 분포도, 수색 및 투명도 분포도와 함께 층별 용존산소, 수소이온농도, 인산염, 질산염, 규산염 등 해수 특성 분포가 동해 전역에 걸쳐 표층부터 해저면 근처까지 제시되었다. 또한 해류 직접관측 및 해류병 투하, 해수 밀도의 역학적 계산식을 토대로 한 해수 흐름의 간접적 추정 등을 바탕으로 동해와 인접해역 표층의 종합적 해류 분포도를 제시하였다.
이러한 동해 전역에 걸친 그리고 표층에서부터 해저면 근처까지 광범위한 분야의 현장 자료 수집을 바탕으로 1932년 춘계 조사는 최근까지도 널리 인용되는 중요한 결과를 제시하였다. 첫째는 동해 어디에서든지 수심 약 200m 이상으로 내려가면(동해 전체 해수의 약 90%를 차지) 태평양에 비교하여 2배 이상 산소를 풍부하게 함유하고 있는 수온 0~1℃, 염분 약 34.1‰을 갖는 해수의 성질이 매우 일정한 바닷물로 구성되어 있다는 동해 고유수(固有水) 이론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동해 상층 일부를 제외하고 동해 대부분의 해수가 단일 수괴로 이루어져 있다는 동해 고유수 이론은 1993년 시작된 한국, 일본, 러시아, 미국 등이 참여한 국제 공동 동해 해양 조사인 CREAMS(Circulation Research of East Asian Marginal Seas) 관측 결과로 1996년 서울대학교 김구 교수 연구팀에 의해 동해 몇 백 미터 아래의 해수는 하나의 단일 수괴가 아닌 서로 다른 수괴들로 이루어 졌음이 밝혀지기 전까지 60년 이상 학계의 정설로 남아 있었다(Kim et al., 1996). 1932년 동해 조사에 사용된 관측 장비(수온의 경우 ±0.02 혹은 ±0.05℃의 정확도 보유)에 비해 정밀도가(수온의 경우 ±0.001℃의 정확도 보유) 매우 높은 장비가 CREAMS 조사에 사용되었기 때문에 동해가 하나의 단일 수괴가 아닌 서로 다른 수괴들로 이루어졌음을 밝히는 것이 가능하였다.
둘째는 한반도 주변 해역에 대한 종합적인 표층 해류도를 제시하였다. 6,789개의 표층 해류 측정용 해류병 투하(투하된 해류병 중 25%인 1,729개만 회수됨), 40개 정점에서의 직접적 해수 유동관측 층별 , 수온·염분 분포로부터 얻어진 밀도를 이용한 해수 유동의 간접적 계산 등을 이용하여 흑조(黑潮,쿠로시오), 대마난류(對馬暖流), 동선난류(東鮮暖流, 현재는 동한난류로 칭함), 북선한류(北鮮寒流, 현재는 북한한류로 칭함) 등 한반도 주변해역의 난류 및 한류 분포에 대한 종합적인 표층 해류 모식도를 제시하였다([Fig. 4]). 이러한 1932년 동해 일제 조사를 통해 얻어진 한반도 주변 해역의 표층 해류 모식도는 최근까지도 한반도 주변 해역의 대표적인 표층 해류 모식도로서 학술 논문, 교과서 등에 빈번하게 인용되고 있는 실정이다(Park et al., 2011). 국립해양조사원에서는 국가해류도 제작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한국해양학회 등 해양학계의 전문가 참여를 통해 우리나라 주변 해역 해류모식도를 2015년에 제시하였다([Fig. 5]).
셋째는 한반도 주변 표층 해류, 층별 수온·염분 분포 등과 부유 생물의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해황과 참치, 오징어, 꽁치, 정어리 등 주요 수산물 어황의 관련성 연구를 시도하였다. 이러한 주요한 결과 외에 동해 전역을 대상으로 처음으로 대기 온도 분포도 작성, 해무 발생과 표면 수온의 관계를 제시하였다. 특히, 정밀 해저 지형 조사를 통해 대화퇴 북쪽의 얕은 지형 보고와 함께 오키섬 북쪽 혹은 독도 동쪽에 위치한 얕은 지형 발견 보고도 주목된다.
1932년 춘계 동해 조사는 이전의 조사와 다르게 동해 전역에 걸친 종합 조사로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물론, 동해에 대한 해양학적인 탐사 조사는 한국 근해 최초의 탐사항해랄 수 있는 1787년 프랑스 라페루즈 탐험대의 조사로부터 이후 러시아, 일본을 중심으로 동해에 대한 해양학적인 조사가 이루어져왔다. 그러나 이러한 조사들은 항해 안전을 목적으로 한 수심 측정 등 일부 항목에 대해 그리고 동해 일부 해역을 대상으로 수행되어 왔다.
동해는 한국, 북한, 일본, 러시아에 의해 둘러싸인 북서태평양의 연해로서, 동해의 남북 방향의 길이는 약 1,600km이고, 동서 방향으로는 북위 39도에서 최대 1,000km에 이르며, 동해의 면적은 1,007,600km2, 용적은 1,698,300km3로 약 1,744조 톤의 물을 함유하고 있다(National Fisheries Research and Development Institute, 2001). 동해 전체 면적은 남한 면적(100,210km2)의 약 10배에 해당하는 규모라 할 수 있으며, 동해 전체 수역 중 대한민국 관할 수역의 면적은 약 120,447km2로 동해 전체 면적의 약 12.0%에 해당한다. 이처럼 광범위한 면적을 갖는 동해는 국제수역이라는 특성상 동해 전역을 동시에 조사하기 위해서는 동해를 둘러싼 관련국들의 공동의 협업을 요구하고 있지만, 1932년에는 동해 전역이 일본의 군사적 영향 하에 있었기 때문에 동해 전역에 대한 종합 조사가 가능하였다.
3. 1932년 해양조사의 시대적 의미
1932년 동해 종합조사의 특징은 일본의 동해수산자원 수탈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32년 동해 일제 조사 시기를 5~6월로 선택한 이유는 당시 동해의 주요 어종이었던 정어리와 고등어 등의 봄철 어황과 해황과의 관계를 파악하는데 일차 목적이 있었다. 일본은 동해안의 수산자원 확보에 일찍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인이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함경도 4도의 근해에서 고기잡이를 할 수 있다는 조선과 일본간에 1883년 7월 체결된 ‘재조선국 일본인민 통상장정’을 계기로 그리고 어업 기술의 발달로 울릉도를 비롯한 구룡포, 죽변 등 동해안 주요 항구 및 항구를 거점으로 한 동해안 수산자원에 대한 적극적인 수탈 행위에 나서기 시작하였다(Kim, 2010). 일본 오카야마현, 카가와현 출신의 어부들이 포항 구룡포에 일본인 이주어촌을 건설하기 시작했고, 울릉도에는 전복, 소라 등을 채취하기 위한 잠수기 어업업자들이 본격적으로 진출했으며, 울진 죽변의 경우 일본인 이주어촌 건설을 위해 일본 시마네현의 적극적인 이주 보조비가 지원되었다.
이처럼 일본의 한반도 수산자원 확보를 위한적극적인 일본인 이주어촌 건설에 즈음하여, 조선통감부 농상공부 수산국에서는『한국수산지』제1집을 1908년 12월에 발행하였다3).『한국수산지』에는 인구, 하천, 기상, 해류, 조석, 수온, 항로, 수색, 수심, 저질 등 일반 정보뿐만 아니라, 주요 수산물 정보까지 망라하고 있다.『한국수산지』는 농상공부 수산과장을 맡았던 이하라후미카즈(庵原文一)의 책임 하에 제작되었으며, 이 책은 일본이 조선의 바다가 가지고 있는 풍부한 수산물과 그 가치에 주목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1932년 동해 종합 해양조사는 동해 연안에서 동해 외해로 어장이 확대됨에 따라 고기를 잡을 수 있는 장소와 때를 어민에게 보급하기 위한 연구ㆍ조사목적으로 동해 전역에 대한 해양 조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이러한 과정에서 1932년 동해 일제 해양조사가 실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1932년 동해 조사 시기에 관하여 일본이 1931년 만주사변 무렵부터 한반도 기본정책으로 내세운 한반도의 대륙 침략 병참 기지화 전략과 관련하여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한반도에서 수산업은 농업과 함께 일본의 식량 사정 완화에 크게 공헌하였으며, 특히 정어리 등 수산물은 동물성 단백질의 공급원으로서 역할 뿐만 아니라 일본 공업의 원료로서 활용 가치가 높았다(Park, 1966). 1911년 당시 한반도의 산업별 총생산액 중 수산물이 차지하는 비율은 2.6%이었지만, 1939년에는 8.4%로 크게 증가한 것도 당시의 수산업의 중요성을 반증한다. 또한 조선총독부 자료에 따르면 1932년 기준으로 한국인의 1인당 수산물의 어획고는 73.5원인 반면에 일본인의 1인당 어획고는 한국인의 3.5배인 253.9원으로 (실제 일본인 어획고는 통계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본인에 의한 생산력이 크게 높았다(Park, 1966). 이처럼 1932년 동해 조사 결과는 일제강점기 일본의 한반도 대륙 침략 병참 기지화 전략과 관련하여 동해를 비롯한 한반도 주변 해역의 해황과 어황에 관한 일본의 이해를 높임으로써 한반도 연안에서 일본인에 의한 수산물 어획고 증가를 가져와 일본의 한반도 주변해역 수산자원 침탈에 기여하였을 것으로 고려된다.
일본은 1932년 5~6월에 실시된 춘계의 동해 일제 해양조사에 이어 추계의 동해 해황과 어황을 파악할 목적으로 다음해인 1933년 10~11월에 1932년 춘계 조사와 유사하게 동해 일제 조사를 실시하였다4). 1933년 추계 조사를 통해 대마난류 및 동한난류 등 동해에 영향을 미치는 난류수가 이례적으로 강해짐에 따라 난류성인 정어리, 고등어 등의 어업 기간 연장을 가져왔고, 특히 동해 북부 해역에서는 냉수성 어류들의 어획량이 매우 적었음을 보고하였다.
1932년 동해 일제 조사의 결과에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정밀 해저 지형 조사를 통해 독도 동쪽에 위치한 얕은 지형 발견 보고이다. 1932년 조사를 주도적으로 이끈 우다는『수산시험장보고(水産試驗場報告)』제5호에 기고한 조사 결과 보고서에서 조사 결과를 12가지로 요약하면서 그첫 번째로 독도 주변의 얕은 지형 발견 소식을 실은 것도 주목된다.
Ⅳ. 결론 및 토의
이 논문에서는 동해 전역을 대상으로 한 사실상의 최초의 종합 해양조사라 할 수 있는 일본의 1932년 동해 해양조사에 대해 소개하고, 그 주요한 결과 및 시대적 의미를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일본의 동해 해양조사에 대한 역사와 실태를 분석하고, 일본이 일제강점기 무렵부터 동해를 얼마나 중시해 왔는지 검토해보았다. 독도박물관 초대관장을 역임한 이종학 선생이 수집한 『일본수산잡지』(1893년)는 “이미 일본해란 公稱을 가진 이상 그 해상주권은 우리가 점유한 게 아니겠는가. (중략) 오늘날 일본의 어선을 이 해상에서 종횡 무진케 하고 어업에 힘써 이익을 챙기는 것을 습관화하고 그 실적을 天下公衆에 인식시켜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훗날 이 해상의 주권과 관련해 다른 나라와 논쟁을 벌였을 때 실적을 표명하는 논거가 약해지므로 국권상 불리하게 되는 경우도 예상할 수 있다”고 하여(Dokdo Museum, 2002) 동해에 대한 일본의 뿌리 깊은 인식을 짐작할 수 있다.
러일전쟁 과정인 1905년 2월 독도를 강점한 일본은 동해를 자국의 내해로 본격적으로 만들기 위한 전제 작업의 일환으로 동해 해양조사를 실시했다. 일본은 초창기에 해군 수로부가 측량성과를 바탕으로 간행한 해도에 러시아 등 유럽의 조사를 기입했지만, 수산강습소 해양조사선 텐오마루 건조와 농림성 수산시험장 신설 등을 계기로 동해 해양조사가 본격적으로 진행하였다. 그 결과 동해의 기온, 기류, 해무, 표면수온 등뿐만 아니라 해저 1,000m까지 심도에 따른 저층 조사가 폭넓게 이루어져 북한한류와 대마난류가 혼재하는 동해의 특징 등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수산시험장은 동해 전체에 대한 일제조사의 필요성이 절실해지면서 1932년 5∼6월 동해에 대한 일제 조사가 실시되기에 이르렀다.
1932년 조사의 목적은 각 지역과 긴밀하게 연락해 동시에 관측ㆍ조사함으로써 광범위한 동해의 해황실태를 파악하고 그 유동의 진상을 밝히며 어황의 근저를 보다 분명하게 파악하는 것이었다. 정어리ㆍ고등어 등 동해의 주요 어종의 어황과 해황의 관계를 비롯해 그동안 불확실했던 한반도 북부 연해, 동해 북부 및 중앙부의 해황을 파악하기 위해 그 시기도 정해졌다. 이를 위해 수산시험장은 북위 50도 사할린 지역에서부터 북위 20도 타이완 지역까지 조사선 50척을 거의 동시에 출동시켜 서로 제휴하면서 분담구역을 관측했다. 여기에는 일본 측뿐만 아니라 동해에 면한 조선측의 수산시험장과 조선총독부 직할 수산시험장도 동원되었다.
1932년 동해 춘계 조사는 동해 전역에 걸친 종합 조사로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동해 전역에 걸친 그리고 표층에서부터 바닥까지 광범위한 분야의 현장 자료 수집을 바탕으로 1932년 춘계조사는 최근까지도 동해 해양연구에 있어서 자주 인용되는 몇 가지 결과를 제시하였다. 첫째는 동해 어디에서든지 수심 약 200m 이상으로 내려가면 산소를 풍부하게 함유하고 있는 수온 0~1℃, 염분 약 34.1‰를 갖는 해수의 성질이 매우 일정한 바닷물로 구성되어 있다는 동해 고유수(固有水) 이론의 제시이다. 동해 고유수 이론은 1993년 시작된 한국, 일본, 러시아, 미국 등이 참여한 국제 공동 동해 해양 조사인 CREAMS(Circulation Research of East Asian Marginal Seas) 관측 결과로 동해 몇 백 미터 아래의 해수는 하나의 단일 수괴가 아닌 서로 다른 수괴들로 이루어 졌음이 밝혀지기 전까지 60년 이상 학계의 정설로 남아있었다.
둘째는 한반도 주변 해역의 난류 및 한류 분포에 대한 종합적인 표층 해류 모식도를 제시하였다. 이러한 1932년 한반도 주변 조사를 통해 얻어진 한반도 주변 해역의 표층 해류 모식도는 최근까지도 한반도 주변 해역의 대표적인 표층 해류 모식도로서 학술 논문, 교과서 등에 빈번하게 인용되고 있으며, 2015년도에 와서야 국립해양조사원에서는 독자적인 우리나라 주변 해류 모식도를 제시한바 있다.
셋째는 한반도 주변 표층 해류 흐름과 참치, 오징어, 꽁치, 정어리 등 주요 수산물의 어황과의 관련성을 검토하였다. 또한, 이전과 진전된 해저지형 조사를 통해 대화퇴 북쪽의 얕은 지형의 발견과 함께 오키제도 북쪽 혹은 독도 동쪽에 위치한 얕은 지형의 발견보고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은 동해안의 수산자원 확보에 일찍이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1932년 해양조사는 어업 기술의 발달로 동해 연안에서 동해 외해로 어장을 확장해가는 과정에서 동해의 수산자원을 효율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동해의 수산자원은 장기적인 변동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 이러한 장기적인 수산자원의 변동상은 기후변화 외에 남획이나 해양오염 등 인간의 활동에도 크게 영향을 받는다. 인간에 의한 남획과 자원 수탈을 목적으로 하는 해양 수산 연구가 아닌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바다를 위한 해양연구가 필요한 시점에서 일제강점기에 행해진 다양한 해양 조사활동들이 일본의 동해 수산자원 확보 및 수산자원 수탈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 혹은 어떻게 연관되었는지에 대한 연구는 의미 있는 접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행해진 다양한 한반도 주변해역 해양조사는 일제강점기 한반도 수산자원 침탈과 남획의 길라잡이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동해 전역을 대상으로 한 1932년 해양 조사 자료는 동해 해양환경의 장기 변동연구 및 동해 수산자원 변동 원인 규명 연구를 위한 역사적 자료로서 가치를 가지고 있음도 사실이다.
이 연구에서는 1932년 동해 일제 해양조사의 실시 배경, 조사 개요 및 조사의 결과와 의미만을 한정적으로 다루었지만, 향후 1932년을 비롯한 일제강점기 한반도 주변해역 해양조사 전반에 대한 파악이 필요하다. 또한, 1932년 동해 일제 해양조사를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689편의 연구발표를 통해 일본 어장학 및 수산해양학의 기초를 확립한 우다(宇田道隆, 1905-1982)에 대한 후속 연구도 요구된다.
Acknowledgments
이 논문은 2013년 정부(교육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13S1A5B6054962).
한국해양학 역사에 대한 다양한 자료 수집과 함께 후대를 위해 활발한 집필 활동을 해오신 한수당 자연환경연구원 한상복 원장님과 CREAMS 프로그램을 통해 동해 해양연구의 미래지향적 발전과 함께 동해에 관한 유익한 가르침을 주신 서울대학교 지구환경과학부 김구 명예교수님과 김경렬 명예교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더불어 유익한 지적을 해주신 심사위원분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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