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 중심 유아교육의 향방에 관한 시론: 놀이정신과 자기배려교육을 중심으로
Abstract
This study aims to develop a discourse on the direction of play-centered early childhood education through awareness of play. To this end, the awareness of play, which has been discussed in earnest since modern times, was discussed. And it proposed the direction of play-centered early childhood education by talking about learning where the spirit of play can be raised and caring for oneself. The discussion is organized as follows.
To this end, the discussion of play theory and the discussion of play spirit were approached from the initiative approach of "self-caring education" for learning alive. In two dimensions, the topic of discourse was classified as the dimension of the existential value of play and the dimension of its intrinsic value. the diversion of ideas on play and the fun and rule of play itself. Next, we have found that the direction of play-centered early childhood education should be practiced as educational act in which the spirit of play is alive and self-caring education. In the former case, we emphasized the role of the play world and play spirit of infants, the peculiarity of play and ‘field’ of learning, in the latter case, the subject of educational play and learning, the discourse play and the educational connotation of 'play-meeting'.
Keywords:
Direction of play-centered early childhood education, Play spirit, Self-caring educationⅠ. 서 론
디지털 원주민(digital native)이라 불리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인류는 과학기술의 급속한 변화 속에서 주저앉거나 나가거나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불안한 선상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산업혁명보다 몇 십 배(또는 몇 백배)의 충격이 가해질 것으로 예상하는 과학자들의 예견을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나날이 새롭게 변화된 모습으로 일상생활을 침투해 오고 있는 과학기술의 변화는 편의성이라는 도구적 역할을 넘어 인간의 의식 변화에 까지 영향을 미치며, 기계와 인간이 더 이상 분류될 수 없다는 전망을 현실화하고 있다. 이는 모든 ‘경계의 해체(또는 모호함)’를 통해 한편으로는 지식과 관계의 융합을, 다른 한편으로는 파편화된 다양한 주체들을 배경으로 ‘보편적인 것’으로부터‘새로운 것’을 창조해 나가는 것을 일상화하도록 만든다. 말하자면 근원적으로 객관적 진리 체계의 의심과 다양성을 토대로 지속적인 새로움을 재구성해 나가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는 교육 분야 역시 간학문적 또는 초학문적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 불가피한 시대적 요구이자 사명이며 변혁의 목표가 되어야 함을 촉구한다. 특히 모든 공교육의 시초가 되는 유아교육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변화에 대한 더 많은 시대적 책무성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유아교육 학자들은 4차 혁명시대에 따른 교육혁명 담론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것으로(Lee & Yoon, 2017), 유아교육연구에서 빅테이터를 활용하고 적용하기 위한 과제를 탐색하는 것으로(Kim, 2016), 유아교육현장에서 미디어와 교육을 연계시키기 위한 방안을 찾기 위한 기초 작업으로 그와 관련된 연구들을 관점에 따라 분류하여 논의하는 것으로(Jeong, 2012), 거시적 또는 미시적 접근에서 다양한 논의들을 해오고 있다.
그러나 정작 새로운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다원적이고 총체적인 역량을 갖춘 “고차적 역량(high order capability)”(Choi, Yoo, Lee, and Jeon, 2010)의 유목적 공간일 수 있는 유아교육의 중심에 있는 놀이에 대한 논의들은 대체로 모던적 시각에 머물러 있다. 그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간략하게 두 가지 입장에서 거론하자면, 먼저 언젠가부터 놀이 그 자체가 지닌 교육적 의미와 가치에 대해 소홀히 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고, 다음으로 미래사회에서 요구되는 역량들을 실재화하기 위해 놀이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향방을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놀이 자체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놀이를 보는 관점과 교육의 과정에서 풀어내는 방식에 관한 것으로, 놀이를 단지 사회적 구성물로서 접근하는 근대적 놀이로부터 ‘탈’하여 ‘놀이, 그 자체’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미래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요구되는 역량에 관한 것으로 “‘비-진지한 것, 비-의무적인 것, 비-본래적인 것’으로서 부정성(‘비-’)을 가진 경계에서 규정되며, 분방하고 한가로운 것으로서 ‘노동’의 특성을 가지며, 삶의 진지함과의 대립에서 파악되는 것”(Chung, 2012: 199)으로부터 길러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특성들은 포스트모던적 시각에서 접근한 유아교육의 중심에 있는 놀이의 존재론적·본질적 특성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유아교육 속의 놀이는 시공간을 초월한 불역성과 그 자체로서 모든 에너지를 소진시키는 활동이자 일의 속성을 가지며(Jung, 2008: 1), 경험과 관계의 융합을 통해 창의적 사고를 출현시키는 질료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재 유아교육의 장에서 펼쳐지고 있는 놀이는 과연 어떠한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질문의 바탕에는 유아교육에서 놀이가 중심이 되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보다는 ‘어떤 놀이’, 즉 (여기서는 방법론적이기 보다는) 본질적·존재론적 질문이 깔려있다. 이러한 문제 제기는 언제부터인가 유아교육에서 놀이가 ‘놀이, 그 자체’ 보다는 인지적 학습을 위한 도구로써 사용되고 있다는 비판적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초‧중등교육이 추구하는 교육과정을 모델로 삼아 놀이의 본질보다는 놀이를 교과내용의 한 영역 또는 그 자체로 보며 놀이를 인지적 학습을 위한 도구로 전략시킨 것은 아닌지를 조심스럽게 타진해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아교육에서 놀이는 유아의 학습 방식으로, 유아가 행복하고 정신적으로 건강한 인간이 되도록 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유아중심 교육의 핵심이자 유아에게‘자연적인’활동으로(Cannella, 2002: 244), 필요충분 요건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놀이가 본질적으로 인류의 문명과 문화를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Choi, 2011)이며 비현실성과 현실성의 두 영역에 걸친 현존재의 양면성을 통해 긍정적(Kim 2013)이라는 점에서, 유아교육에서 놀이는 유아들이 즐기며 소통하고 공감하며 새로운 펼침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적합한 교육과정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놀이교육은 ‘놀이, 그 자체’가 지닌 교육적 의미와 가치를 펼치게 된다.
이에, 최근 놀이가 교육으로 연계될 수 있도록 놀이의 경직성을 해체하고 놀이를 놀이답게 해방시키는 것으로 아이들의 권리를 찾고자 하는 다각적 시도들이 제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Arvid Bengtsson은 1977년 국제놀이터협회(the International Playground Association: IPA)에서 ‘아동의 놀 권리(child’s right to play)’의 우선권이 여전히 낮게 주어지고 있으며, 자주 놀이가 필요 없는 일로 간주되거나 심지어 사치로서 여겨지고 있으며, 우리(성인들)는 여전히 근본적으로 그것이 어떻게 중요한지를 잘 알지 못하고 있다고 강조한다(Veerman, 1992: 369). 이러한 문제제기는 유엔의 아동 권리 협약(CRC, 1989, 11. 09), ‘행복 학교’를 지향하는 ‘역량중심 교육과정’ 전개(교육부. 2015 교육과정 개정), ‘어린이 놀이헌장’ 선포(전국 시도 교육감 협의회. 2018. 05. 04) 등과 같이 놀이의 존재론적이며 본질적인 의미와 그 교육적 가치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현장의 실천적 관심으로 이어지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남겨진 과제는 유아교육에서 ‘놀이, 그 자체’가 어떻게 교육적일 수 있는가이다. 말하자면, 놀이자에게 즐겁고 재미있는 놀이를 어떻게 제도화되고 제한될 수밖에 없는 교육적인 활동과 조화를 이룰 것인지에 대한 고민인 것이다.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놀이의 존재론적이며 본질적인 의미에 대한 숙고와 함께, 놀이가 유아들에게 놀 권리와 배움의 권리를 찾아줄 수 있도록 배움의 과정을 어떻게 펼쳐나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고민의 바탕에는 성인중심, 일 중심의 이원론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즉 놀이가 진정한 배움의 과정이 되기 위해서는 유아교육에 대한 근대적 사고로부터 탈피하여 ‘놀이 그 자체’의 본질적 의미를 찾고자 하는 세계 중심적인 전환적 사고가 요구된다. 이때 놀이중심 유아교육은 ‘놀이를 놀이답게’ 하는 것으로‘교육을 교육답게’하는 향방을 찾게 될 것이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놀이 중심 유아교육 향방에 관한 시론적 접근을 전개하였다. 이는 놀이와 배움이 조화로운 놀이교육이 유아의 놀 권리와 배움의 권리를 동시에 되돌려 주는 교육됨임을 주지하며, 유아들에게 배움의 선택권을 돌려주는 한 방식으로 ‘자기배려교육’이 실천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를 위해 먼저 후기 산업산회 전·후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놀이에 관한 존재론적이며 인식론적인 가치와 의미에 대해 담론화 하였다. 이러한 놀이에 대한 담론들은 놀이와 배움이 어떻게 조화를 있을지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주는 역할을 한다. 다음으로 놀이 정신이 살아있는 배움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자기에의 배려교육’에서 찾고자, 그 중요성을 시론적 접근에서 기술하였다.
이러한 접근은 놀이의 현재적 개념(포스트모던적 접근)이 사회변화에 의해 사회적으로 함축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견지에서, 놀이의 현재를 만들어낸 과거에 대한 성찰과 현재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발언의 자유’를 소환하는 담론”(Foucault, 2017)적 특성과 시론적 타진을 반영한다. 이는 즉각적인 효용성에 대한 대안책을 제시하기보다는 진정한 놀이 중심 유아교육과정을 향한 노정의 과정에서 탐구되어야 할 것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고 이론화 작업을 구축하는 데 기여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Ⅱ. 놀이에 관한 담론들
이성과 행위의 이원론적 분리 속에서 이루어진 근대적 담론들은 후기 산업사회가 도래하면서 비판적 대상이 되었다. 놀이에 대한 담론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이에 본 장에서는 놀이의 존재론적 가치와 본질적 가치에 대한 담론들을 펼쳐 보이는 것으로‘놀이, 그 자체’에 대한 의미를 파악하고자 한다.
1. 놀이의 존재론적 가치
모든 철학적 주제와 인식론의 바탕을 이루는 소크라테스(Socrates)와 플라톤(Platon)의 ‘이성 중심의 논리’는 근대이전의 놀이에 대한 담론에서도 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Socrates)의 ‘이성 중심의 논리’는 고대사회로부터 분화의 시대로 일컫는 근대사회에 이르기까지 서양철학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특히 플라톤(Plato)에 와서 이성중심의 이원론적 사고가 더욱 강화되면서 정신과 육체의 분리가 엄격해졌다. 그 이후 플라톤주의의 영향으로 육체적인 욕구나 욕망은 깨끗한 영혼을 더럽히는 어둠의 존재로 여겨졌다. 그 가운데에서도 놀이는 몸의 자연스러운 힘에 의거하고 몸에서 자신의 본질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는 특성으로 인해 차단되거나 억제되어야 할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플라톤주의적 접근에서 ‘몸 중심의 자연스러운 놀이’는 이성적 존재인 인간을 타락시키는 주범으로, 성숙한 인간이라면 멀리해야 하는 헛된 짓에 불과했다. 특히 놀이의 본성은 일이 가지는 진지함과 심각함, 이성과 현실, 경제성과 생산성 등과는 구분되는 특수성, 비진지함, 즉흥성, 유치함, 사소함, 모호함 등으로 인해 부정적으로 평가되었다. 말하자면 플라톤이 시와 예술을 저급한 것으로 간주한 것처럼 놀이는 인간의 욕망과 쾌락을 부추기며 참된 진리로부터 멀리하게 하여 선의 이데아를 따르는 데 방해 요소일 뿐이다(Oh, 2013: 131).
그러나 이러한 놀이에 대한 폄하된 사고는 칸트(Kant)와 쉴러(Schiller)에 의해 재평가되기 시작한다. 칸트와 쉴러에 의하면 놀이는 상상력과 지성의 조화와 일치를 가능하게 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칸트는 기존의 합리론과 경험론에서 강조되었던 이성과 경험을 종합하고자 했다. 여기에는 인간의 행위의 자율성이 강조되며, 이때 자율성은 오직 오성의 능력에 의해 획득되는 자율성으로 자유의 속성을 가진다. 자유는 이성적 존재의 인과율의 한 유형인 의지로 이성과 경험적 자극 사이를 메우는 역할을 하는 모든 행위의 총체이다. 이로써 의지의 표명은 행위의 개념이 되며 자유는 짜여진 자유가 아니라 모든 구속으로부터 벗어난 해방의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이러한 해방은 모든 이분법적 논리의 해방을 의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칸트에게 있어 놀이는 지성과 상상력의 합목적인 일치를 우연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생산적 상상력’ 역할을 하는 존재이다. 그의 ‘생산적 상상력’은 놀이의 자유로운 정신을 토대로 하며, 자유로운 정신은 미성숙한 단계에 있는 인간의 자연적 상태를 의미한다기보다 자연적 충동을 스스로 제거하고 도덕법칙에 자발적으로 따르는 도덕주체의 정신을 말한다.
쉴러는 칸트의 이러한 놀이 개념을 보다 심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형식충동과 감성충동에 치우치지 않은 이 둘의 조화에서 가능하며, 이 조화에서 놀이의 충동이 발생하고 여기서 예술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놀이를 하는 한에서 인간은 비로소 인간일 수 있다고 본 것이다(Chung, 2016: 8-9). 즉 인간의 모든 상황들 아래에서 바로 놀이와 ‘단지’ 놀이만이 인간을 완전하게 만들며 인간의 이중적 본성을 다시 한 번 전개한다(Welsch, 2005: 56).
그러나 놀이에 대한 이러한 철학적 성찰은 지극히 인간적 관점에서 놀이에 접근하는 것으로 세계의 놀이, 주체적 놀이로서 놀이 고유의 존재론적 의미와 실천적 가치에 대한 파악에는 여전히 제한적 의미를 전달한다.
근대 이후의 놀이 담론은 니체(Nietzsche)로부터 전개되어 놀이에 대한 가치가 재조명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근대적 담론에서 놀이를 제한적으로 수용한 방식과는 달리 놀이정신이 담긴 놀이 철학의 실천적 의미를 그의 ‘힘에의 의지’와 ‘영원회귀’를 통해 보다 심층적으로 전개한다(Chung, 2016: 3-24). 그에게서 ‘힘에의 의지’란 세계의 모든 과정을 힘으로부터 나온다는 의미로 단순히 물리적 힘만 아니라, 동물적인 힘, 순수함의 힘, 가치의 힘, 법률의 힘, 진리의 힘 등, 삶에 있어 그것의 방향을 지시하는 모든 힘에의 의지를 의미한다. 이는 일체가 모인 하나의 중심이 아니라 다수이며, 일정한 고정적인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며, 단순히 타인을 지배하려는 욕구 이상의 개념으로 자신의 충동을 억제할 수 있는 자기 통제의 힘까지 포함한다. 이처럼 ‘힘에의 의지’는 근본적으로 내적 역동성에 관한 것으로 상승적 삶에의 의지, 곧 생명에의 의지로 표현되기도 한다. 니체는 생명활동을 하는 한 모든 존재자는 이 원리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이러한 니체적 접근은 헤라이클레이토스의 단편 B52에 담긴 글귀에 등장하는 ‘놀이하는 아이’(pais paizon)를 통해 드러낸 놀이정신에서도 볼 수 있다. ‘세계운행은 이리 저리로 놀이판을 깔고 놀이하는 아이이며, 아이의 왕국이다’라는 구절에서 ‘놀이하는 아이’(pais paizon)는 존재자 전체를 지배하는 세계로서 상징되며, 세계는 놀이로서 지배한다(Kim, 2013: 58). B52의 놀이하는 아이는 니체의 저서인『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세 가지 변화’에 등장하는 놀이하는 아이(Nietzsche, 2007)를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여기서 니체는 니힐리즘의 극복과 새로운 세계의 창조가 어떤 방식으로 가능한지를 보여주며, 놀이가 목적과 인과 그리고 선‧악의 사슬로 묶인 세계보다 더 힘이 있고 삶에 더 깊이 뿌리내리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는 B52의 ‘놀이하는 아이’(pais paizon)를 ‘영원회귀’와 ‘힘에의 의지’를 구현하는 범형으로 삼은 것이다. 니체의 ‘힘에의 의지’는 “영원히 파괴하고 다시 창조하는 디오니소스적”인 놀이를 통해 잘 나타나며(Chung, 2016: 24), ‘영원회귀’는 놀이 정신을 가진 자유롭고 독립적인 “해방된 개인(emancipated individual)”(Trigg, 2000: 107), 즉 위버맨쉬(Übermensch)를 통해 현시된다. 위버맨쉬는 무엇보다 ‘지금, 이곳’에 충실한 자로서, 현재라는 찰나적 순간에 대해 몰입하며 세계와 삶에 대한 긍정적인 자세를 가진 자이다. 즉 놀이정신을 가진 자이다. ‘놀이를 한다는 것’은 우연을 긍정한다는 것이고, 우연에 대한 긍정은 세계와 삶에 대한 긍정을 의미하는 것(Chung, 2014)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니체적 놀이 정신은 놀이에 대한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범주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치를 형성하는 발판을 제공한다. 말하자면 인간의 놀이가 아닌 ‘놀이, 그 자체가 가지는 힘에의 의지’에 관심을 기울이게 한다.
한편, 놀이학을 구체화한 핑크(Fink) 역시 헤라이클레이토스의 단편 B52의 ‘놀이하는 아이’에서 놀이 정신을 파악하고자 시도한다. 그는 니체와 마찬가지로 ‘우연성’, ‘모호성’, ‘일회성’, ‘다의성’, ‘예외성’, ‘독특성’, ‘탈주체’, ‘탈중심’, ‘탈영토’, ‘탈코드’ 등의 개념에 집중하며 세계의 운행을 단편 B52의 놀이하는 아이와 연관 짓는다. 즉 세계의 운행이 형이상학적 목적이나 기계적인 법칙이 아니라, 무목적적이고 자연에 맡겨진 놀이하는 아이와 같이 우연과 순간에 의거한다고 본다. 핑크의 놀이정신은 놀이가 세계의 상징이 되고, 놀이에서 세계는 자신을 현시한다고 보며, ‘놀이, 그 자체’의 존재론적 의미에 질문을 던진다. 핑크의 놀이정신은 “놀이자 없는 놀이(Spiel ohne Spielers)”(Chung, 2016: 15) 또는 세계의 놀이로“이름 없는 부재의 영역(ein namenlose Bereich des Abwesens)이며, 거기에서 모든 것이 현상으로 옮겨지며, 거기에로 모든 것이 다시 사라진다.”(Kim, 2013: 60) 세계는 일정한 법칙에 의거하기보다는 놀이하는 아이와 같은 것으로, 특정한 누구의 소유가 아닌 모든 존재자들의 ‘터’인 것이다.
핑크의 이러한 놀이 정신은 세계도 놀이와 마찬가지로 뚜렷한 목적 하에 움직이기 보다는 세계 그 자체가 목적이자 근거가 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놀이를 세계의 상징으로 간주하며 놀이의 존재론적 의미와 가치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 핑크의 놀이에 대한 이와 같은 접근은 현재 놀이가 법칙적 또는 규준적 패러다임 속에서 해석됨에 따라, ‘놀이, 그 자체’의 본질적 특성인 놀이정신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를 숙고하게 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핑크의 놀이 이론은 놀이 이론들이 같은 원리를 갖지 않고 있으며, 그로 인해 놀이가 공간 안에서(또는 그 반대로) 전개되는 이행이 다양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적인 한계를 지닌다.
2. 놀이의 본질적 가치
놀이는 본질적으로 ‘재미를 추구하기 위한 자발적 행위’라는 점에서 특정한 정신적 상태가 아니라 표현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이성중심의 근대적 담론에서는 놀이의 이러한 특성 때문에 주변적인 관심의 대상으로 밀려나 있었다. 하지만 이후 이성과 행위의 문제를 분리해서 볼 수 없다는 인식이 강조되면서 놀이와 삶을 연결시키려는 시도들이 일어났다. 이는 놀이를 일상 속의 특정한 일부가 아니라 별개의 영역으로 다루고자 하는 것으로, 이성중심의 근대적 담론 속에 갇혀 있던 놀이를 해방시키는 역할을 했다. 대표적인 학자로 호이징어를 들 수 있다.
『호모 루덴스 (Homo Ludens)』(1993)의 저자인 호이징어는 기존의 심리학적 또는 생리학적 접근에서만 놀이를 바라보던 제한적 시각에서 벗어나 놀이의 본래적 의미의 기능을 파악하고자 했다. 특히 그는 놀이를 ‘놀이 아닌 어떤 것과의 비교’로부터 파악하기 보다는 ‘놀이, 그 자체의 특성을 파악하는 것’으로, ‘놀이 그 자체로서 고유한 하나의 장’으로 이해하며 놀이분석을 문화분석의 차원으로 확장하고자 시도한다. 그는 놀이의 목적이나 역할을 규명하기보다는 놀이적 성격을 이해하는 것으로 놀이를 삶의 한 영역으로 포함시키고자 했다. 이러한 접근은 놀이가 어떤 특정한 목적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을 지닌 어떤 것’, 즉 놀이의 형식이 아니라 놀이의 내용적·실천적 측면에서 독자성을 갖는 것(Huizinga, 1993)에 주목한다.
이는 “놀이를 인간의 모든 사회적 행위의 출발점으로 삼으며,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문화 자체를 ‘놀이의 한 형태(subspecie ludi)’로 받아들인 것이다(Choi, 2011: 32). 즉 놀이를 이성적 능력이 부족한 유년기의 전유물로 여기던 관습을 허물고 놀이를 ‘문화’를 파생시키는 삶의 총체로서, 놀이의 영역을 ‘문화의 영역’과 등가적인 위치에서 바라보고자 한 것이다(Huizinga, 1993). 놀이를 인간의 모든 사회적 행위의 출발점으로 삼으며,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문화 자체를‘놀이의 한 형태(subspecie ludi)’로 바라보는 호이징어의 시각(Choi, 2011: 32)에서 놀이는 문화현상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개념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호이징어의 놀이세계는 일상생활세계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일상생활의 세계 혹은 ‘당연시되는 세계(world taken for granted)’는 Schultz(1962)가 언급하듯이 유한한 의미의 영역으로, 이 영역은 있는 그대로의 외부 세계를 즉각적으로, 의문의 여지없이 받아들이며, 그 의미에 대해 자연스러운 태도를 갖는 것이다(Maffesoli and Lefebvre, 2002; 143). 그렇지만 호이징어에게 놀이의 세계는 제한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발적이지만 놀이하는 동안 절대적 구속력을 갖는 규칙에 따라 행위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규칙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며, 또한 그에 따른 긴장감 자체를 놀이자들이 즐거움으로 받아들이는 특성을 지닌다. 이는 일상에서의 긴장감과는 다르다. 즐기기 위하여 놀이를 선택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긴장감은 오히려 놀이 규칙의 강도를 높이는데 적극적이 되며, 동시에 그 재미의 강도도 강해진다. 말하자면 놀이의 세계에서 놀이의 규칙, 긴장도, 재미가 서로 비례적 관계를 이룬다. 이처럼 일상의 규칙이 억압적 특성을 갖는데 비해, 놀이의 규칙은 비현실성을 토대로 탈일상적 재미를 주는 즐거움의 특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호이징어(Huizinga, 1993)는 이를 ‘놀이세계의 특이성’으로 일컫는다. 한편, 이러한 놀이의 특이성은 놀이세계와 일상생활세계를 일치시키지 않는 요인이 되어, 호이징어의 놀이와 삶을 연계시키려는 시도를 자기모순에 빠지게 만든다.
호이징어가 놀이와 문화를 개념적으로 연결시켜 문화가 지닌 놀이적 성격을 파악하고자 했다(Choi, 2011)면, 카이와는 자신의 저작『놀이와 인간』을 통해 놀이분석을 문화분석적 차원에서 접근하여 놀이 자체의 성질을 밝히고자 집중했다. 특히 그는 우연놀이를 통해 놀이의 고유한 기능이 어떤 능력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놀이 그 자체’임을 드러내고자 했다(Kim, 2008). 왜냐하면 우연놀이는 전혀 생산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위협적이거나 공포감마저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카이와는 이러한 놀이의 특성이 반드시 문화의 생성이나 발전과 관련되는 것이 아님을 드러낸다고 보았다. 이는 호이징어가 놀이정신을 문화발전의 원동력으로 본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카이와의 놀이에 대한 이러한 입장은 놀이의 상반된 특성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놀이의 경험이 주는 긍정적 효과의 기능 이전에, 놀이 자체의 즐거움에 대한 연구가 탐구되어야 함”(Caillois, 2003)을 피력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는 놀이의 본질에 대한 물음이며, 이를 위한 놀이분석의 필요성을 수반한다.
카이와는 놀이 자체의 즐거움을 이해하기 위해서 놀이를 ‘외적 형태’와 ‘내적 성격’을 동시에 고려한 분류작업과 놀이분석을 시도했다. 놀이의 외적 형태의 가장 기본적인 자질들로는 경쟁, 우연, 모의, 현기증으로, 이 자질들의 우위에 따라 아곤(agôn, compėtition), 일링크스(ilinx, vertige), 알레아(alea, hasard), 미미크리(mimicry, simulacre)로 구분하였다. 이에 대한 구체적 설명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Kim, 2001: 174-175; Kim, 2008: 163; Caillois, 1994). 즉 아곤은 시합이나 경기를 뜻하는 그리스어로 규칙이 있는 경쟁 속에서 자신의 능력만으로 승리를 얻고자 하는 야심이며, 일링크스는 소용돌이를 의미하는 그리스어로 현기증을 추구하는 것이며, 알레아는 요행이나 우연을 의미하는 것으로 의지를 포기하고 운명의 판결을 불안한 마음으로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며, 미미크리는 흉내와 모방을 의미하는 것으로 다른 사람의 모습을 좋아하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놀이를 지배하는 이 네 가지 요소는 서로 조합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놀이의 분류는 훨씬 더 다양하고 복잡한 모습을 띄게 된다. 이러한 놀이 특징 분류의 결과는 놀이의 범주를 네 가지 수행 원리에 따라 체계화하는 데 활용된다. 그는 모든 놀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놀이의 내적 상태를 파이디아(paidia)와 루드스(ludus)로 나눈다. 전자가 모든 놀이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로움, 소란스러움, 즉흥, 기분전환, 에너지 발산 등과 같이 놀이본능의 자발적 표출의 성격을 의미한다면, 후자는 규칙과 질서가 놀이의 본질이 되는 놀이의 제도화 또는 질서화 되는 성격을 의미한다. 파이디아가 놀이의 즐거움 그 자체를 중요하게 여긴다면, 루드스는 놀이의 엄격한 규칙 하에 이루어지는 성과를 중요시 한다. 이 두 경향은 놀이의 네 가지 요소(아곤, 일링크스, 알레아, 미미크리)에 공존하여 다양한 사회적 분위기를 형성한다. 예컨대 파이디아의 경향이 강한 사회에서 미미크리와 일링크스가 사회 분위기를 주도한다면, 아곤의 공정성보다는 알레아에 의지하는 경향이 높아지게 되어 부정부패가 심한 사회가 될 가능성이 높다. 반면 루두스적 성격으로의 변모하게 된다면 사회적 패닉으로부터 끌어내어 새로운 질서와 규칙을 세우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카이와(Caillois, 2003)의 놀이분석에는 놀이가 지닌 규칙의 중요성을 볼 수 있다. 놀이에서 규칙은 필수 조건이다. 규칙이 놀이의 자유로움을 제한함에 따라 놀이의 재미를 제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놀이의 규칙이 균형을 잡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예컨대 그는 루두스가 강한 사회는 경직된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일상 경험에서 놀이의 자율성이 제한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이때 루드스는 파이디아를 길들이는 것이 목적이 된다. 따라서 놀이에서 파이디아의 충동적인 활기와 재미는 제거되고 놀이를 제도화하여 놀이에 적응하도록 강요하게 만들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 따라서 그는 무엇보다 루드스와 파이디아의 조화가 중요하다고 여긴다. 이는 카이와의 놀이분석이 사회의 다양한 요인들을 놀이에 반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카이와가 놀이의 목적이 ‘놀이, 그 자체’를 밝히는 것에 있다는 점을 주지할 때, 놀이 자체의 즐거움과 기분 좋음은 놀이 고유의 특성이 된다. 그는 심지어 비록 놀이 고유의 특성이 부정적인 측면으로 흐를지라도 놀이자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면, 그것도 놀이이며 놀이가 되어야 한다고 여긴다. 승자와 패자가 변동이 없는‘규칙이 없는 놀이’보다는 누가 승자가 될지 아니면 패자가 될지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규칙이 있는 놀이’가 놀이자에게 몰입과 희열의 강도를 높인다는 점에서‘놀이 그 자체’의 즐거움을 지닌 놀이라고 본 것이다. 이러한 그의 놀이 분석은 특정 사회의 문화가 어떤 방향으로 진행해 가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데 유용한 기준을 제공해주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놀이자의 재미라고 할 수 있는 놀이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카타르시스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파악하지는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놀이마저 수용하는 그의 놀이에 대한 접근이 과연 교육적인 것과 어떻게 만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과 우려를 남긴다는 점이다. 즉 놀이가 ‘놀이, 그 자체’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시작될 때 과연 교육적 놀이가 가능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놀이, 그 자체’의 놀이 정신에 기반 한 놀이, 즉 ‘즐길 줄 아는 놀이’, ‘재미있는 놀이’가 교육적일 수 있고, 놀이가 교육적일 때조차 재미가 살아있을 수 있다면 교육(또는 배움)이 지겹고 따분하거나 도주하고 싶은 대상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모든 놀이를 교육적일 수 있게 할 수는 있지만 놀이가 교육적일 때 진정한 의미에서 놀이, 즉 재미가 살아있는 놀이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다.
따라서 우리의 고민은 놀이의 부정적인 측면을 어떻게 걸러서 교육적인 놀이로 전환할 것인가에 있기 보다는 ‘놀이, 그 자체’로 놀아지는 놀이가 어떻게 자연스럽게 배움의 과정이 될 수 있는지에 있다. 놀이와 교육 사이의 모순의 당착이 심하여 해결책을 찾기에는 쉽지 않겠지만 이에 대한 관심을 멈출 수 없는 것은 놀이가 유아의 성장과 발달을 위해 반드시 보장되어야 하는 활동이라는 점과 놀이교육과 유아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이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과제는 아이들의 노는 방법을 규범화하여 보편적인 놀이 본능으로 희석시키는 것이 아니라 놀이 욕망이 자연스럽게 배움의 과정이 될 수 있는 대안을 찾는 것이다.
Ⅲ. 놀이 중심 유아교육의 향방 : 놀이정신과 자기배려교육
‘놀이가 과연 교육적인 의미와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관심은 ‘과연 놀이 중심의 교육이 놀이, 그 자체의 재미를 살리며 교육적인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으로 대체될 수 있다. 이는 유아교육에서 ‘놀이가 과연 놀이다운지, 그리고 놀이 그 자체로서의 재미를 살리는 놀이가 과연 교육적인 것으로 전환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제기와 그에 대한 해결의 향방을 요구한다. 이에 본 장에서는 놀이 중심 유아교육의 향방을 놀이 정신이 살아있는 배움과 자기에의 배려교육에 두고 시론적 접근을 해 나가고자 한다.
1. 놀이 정신이 살아있는 배움
놀이 정신은 과학적 이성에 의해 ‘만들어진 정신’ 아니라 사회의 규범적 틀로부터 벗어나고자하는 저항적이며 탈주적이고 원심력적인 정신, 사회의 규칙과는 다른 놀이의 규칙을 통해 지속적인 변화와 창조를 이끌어내는 ‘생성의 정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놀이 정신은 놀이와 일을 분리하지는 않지만 동일시하지도 않는다. 놀이는 일이 가지는 진지함이나 목적 지향적인 속성을 가지기는 하지만, 일이 가지기 힘든 자발성과 비진지함까지도 동반한다. 이러한 특성은 유아들이 형성한 놀이 속에서 흔히 나타난다. 유아들은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과정에서 놀이 규칙을 만들고 그 규칙에 의해 놀이를 유지하지만 놀이의 규칙을 허무는 것으로 새로운 놀이를 생성한다. 놀이 속에서 유아들은 다양한 물질과 마주하며 다양한 역할을 창조하고 삶의 스토리를 만들어낸다. 예컨대 상실과 획득, 죽음과 탄생, 위험과 안전 등과 관련된 다양한 스토리의 형성하는 것으로(Oh, 2013: 133),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무화시키며 진지함과 비진지함을 동시에 작동시키는 것으로, “모든 관계들 간의 조응뿐만 아니라 대립항들의 이원성까지도 함께 초월하는 ‘-되기’”(Deleuze and Guattari, 2003: 673)가 된다. 여기서 유아들은 현실과 놀이의 경계의 해체와 모호함을 기조로, 단일한 주체가 아닌 파편화된 다양한 주체들로 ‘마치 ∼인 것처럼’ 존재하며, 언제나 그렇게 되어가는 과정 속의 ‘되기(becoming)’이다. 말하자면 유아들은 놀이의 과정에서 주체와 대상의 구분이 없으며 언제나 ‘진행형(∼ing)’ 속에서 복잡계를 이루는 다양체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놀이 세계의 특성이 현실 세계를 바탕으로 형성된다는 점에서 현실세계와 완전히 분리되지는 않는다. 놀이가 현실의 삶과 무관할 수 없다는 것은 놀이가 현실의 사회구조적 틀을 완전히 벗어나 놀이 정신을 그대로 보존하기 쉽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이 정신이 살아있는 놀이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은 놀이 세계가 변화와 생성의 에너지를 무한한 창조적 세계로 이끄는 탈주선이 되기 때문이다.
놀이가 중심이 되는 교육의 쟁점은 놀이자와 놀이자의 놀이 행위를 통해 놀이의 특개성이 발현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놀이의 특개성은 ‘놀이, 그 자체’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놀이 특개성은 ‘놀이, 그 자체’는 ‘즐길 줄 아는 놀이’, ‘놀이 그 자체로 놀아지는 것’으로 놀이 정신에 기반 한 놀이 특이성을 수반한다. 놀이 특개성은 ‘재미있는 놀이’라고 할 수 있는 놀이 정신이 살아있는 교육적인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한마디로 ‘재미가 살아있는 배움’인 것이다. 이때 배움은 놀이 욕망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가운데 일어나는 것으로, 보편적인 놀이 본능과는 구별된다. 보편적 놀이 본능은 놀이자의 놀이 욕망을 가두어 놀이의 내부적 형식 속에서 조합되고 코드화되게 한다는 점에서 끝없는 되기(생성)의 과정이 되지 못한다. 이는 놀이가 배움이 되기 위해서는 끝없는 되기의 과정, 즉 생성의 과정으로 펼쳐져야 됨을 의미한다.
놀이가 생성의 과정으로 펼쳐질 때 놀이의 규칙 역시 제한적이고 규격화된 규율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으며 배움의 ‘터’로 나가는 길을 제공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때 ‘터’는 “동질적이며 계량적인 공간으로써 모든 욕망과 다양성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영토의 개념이 아니라, 언제든지 억압과 통제를 벗어나 탈주선(lines of flight)을 탈 수 있는, 욕망의 능동적 에너지가 통제되거나 억압받지 않고 생산과 창조로 나아갈 수 있는 탈영토화(또는 탈코드화)”(Deleuze and Guattri, 2003)된 세계이다.
그러나 이 세계는 유연한 선(supple line)으로 이루어진 분열적 특성을 가진 세계(Deleuze and Guattri, 2003)이기도 하지만, 놀이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점차 경직된 선(rigid line)으로 회귀되는 몰적(molaire) 특성을 가진 세계로 진행될 수 있는 불안한 세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놀이세계에서 새로운 입법이 창설된다는 것은 경직된 현실의 세계와는 다른 자유롭고 유연함을 가진 규칙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놀이가 진행됨에 따라 규칙의 강화와 적용으로 인한 경직된 세계로 전환될 가능성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아들의 놀이 세계는 경직된 선이 완전히 굳어진 실선으로 회귀하기 전에 또다시 탈영토화 되는 특성을 지닌다. 이는 유아들이 놀이 세계가 “현실세계의 모든 분할 혹은 경직된 선으로 인한 위태로움으로부터 탈주선을 타며 새로운 것을 창조”(Olsson, 2017: 109)하는 순간을 체험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컨대 유아 놀이는 놀이의 탈일상성이 주는 긴장의 즐거움을 창조적 힘으로 표출하는 것으로 세계를 놀이터화하며, ‘놀이, 그 자체’로 놀아지는 세계를 창조하는 것으로 생성의 주체를 다양체화 하는 배움의‘터’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유아 놀이의 특이성이 배움의 ‘터’가 되어 특개성을 발휘하는 원동력이 됨을 의미한다.
2. 자기에의 배려 교육
놀이 중심 유아교육은 놀이의 자유로운 흐름이 삶이 되고 놀이가 삶에 대한 배움이 되는‘놀이와 배움이 완전히 구별되지 않는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놀이는 배움의 대상이기 보다 배움의 주체이자 배움 그 자체이다. 그러나 놀이와 삶을 분리하지 않는다는 것은‘모든 삶이 배움의 가치를 가진 교육적 성격의 놀이가 될 수 있는가?’에 관한 질문을 던지게 한다. Jung(2008)은 프레네(Freinet)의 ‘놀이-일’ 개념을 중심으로 교육적 성격의 놀이와 비교육적 성격의 놀이를 시론적 차원에서 탐색하여 분류했다. 그는 아동의 성장과 관련해서 경험하도록 보장해야 하는 놀이를‘교육적 놀이’로, 보상 차원에서 행하는 기분풀이 같은 놀이를‘비교육적 놀이’로 구분했다. 특히 그는 아이들이 교육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정상적인 놀이 활동을 하지 못하는 이유를 인간의 타고난 중심 욕구를 충족시키는 놀이들을 경험하지 못한 것에서 찾았다. 또한 ‘비교육적 놀이’는 놀이에 인위적으로 집중하게 함으로써 놀이가 더욱 더 쉽게 논쟁과 다툼을 불러들이는 기분풀이를 위한 것으로 되게 만든다(Freinet, 1994: 205; Jung, 2008; 재인용)고 설명한다. 여기서 제기될 수 있는 문제는 교육적 놀이와 비교육적 놀이의 기준이나 방법의 문제는 차제에 더 짚고 넘어가더라도 ‘놀이 욕구에 대한 문제와 인위적으로 집중시키는 놀이’에 대한 것이다. 즉, ‘놀이 욕구를 충족시키는 놀이의 경험의 필요 이전에 놀이 욕구 그 자체가 교육적 경험으로 펼쳐질 수 있는 욕구인지, 때로는 인위적으로라도 집중시켜야 하는 놀이가 있지 않은지?’에 대한 논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다양한 만큼 놀이 본능도 다양하다. 그리고 인간마다 놀이 본능이 다르다는 것은 놀이 본능이 완전히 없어질 수 없다는 것이며 비교육적인 놀이 본능 역시 완전히 없앨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비교육적인 놀이 본능을 교육적인 놀이 욕망의 에너지로 어떻게 전환시킬 것일지에 대한 과제가 남는다.
또 하나의 문제는 모순되게도 놀이가 그 시기에 적합한 교육적 경험이 되기 위해서는 ‘교육적’이라는 제한된 범위 안에서 ‘해야 하고, 해야만 하는 놀이’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놀이는 현실적으로 더 이상 ‘놀이, 그 자체’의 본질을 지속시키기 힘들며, 놀이 행위는 재미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필요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해야 할 일’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이에 대한 몰입과 헌신 및 진지함과 같은 놀이 특이성이 사라지게 됨에 따라 결국 교육적 놀이와도 결별하게 된다. 이는 놀이를 교육적 의미와 가치로 전환시키는 연결고리를 단절시키는 것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중요하고 분명한 것은 놀이 중심 유아교육에서 ‘놀이, 그 자체’를 해방시키면서 동시에 교육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 중의 하나가 ‘자기에의 배려(또는 돌봄) 교육’이 될 수 있다.
푸코(M. Foucault)에 의하면, ‘자기에의 배려’는 자기에의 전념, 즉 자기 자신을 돌보는 것이다. 이는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전적으로 몰두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Foucault, 1999: 83-85). ‘자기에의 배려’는 타인과의 교환 작용과 상호 의무 체계의 가능성을 포함한 정신적 조력에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다(Foucault, 1999: 71). 말하자면 지속적인 자기 점검을 통해 무분별한 욕망의 포로로부터 벗어나 윤리적 실천을 ‘함께’ 할 수 있도록 서로 자극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푸코의 ‘자기 배려’는 자신을 망각하지 말고 돌보며 배려하는 ‘자기 인식’을 동반하는 것으로, 더 큰 외연을 가진 명령을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실천 방식이다(Kim, 2009: 29-30). 이러한 점에서 ‘자기에의 배려’는 ‘자기 인식’과 함께 ‘윤리적 주체’로서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말하자면 유아 스스로 놀이 욕망을 질적으로 고양시켜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주체로서 교육적 놀이를 선택하고 형성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때 자기에의 배려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자기에의 배려’는 그 자체로서 교육적 함의를 지니고 있으며, 놀이가 교육적일 수 있고 교육이 놀이가 되어도 놀이의 특이성이 희석되지 않을 수 있으며, 그래서 배움의 주체 ‘되기’가 가능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이며 현실적인 방안이라는 점에서 최적의 대안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자기 배려의 확장된 실천 방식의 하나가 타인과의 소통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만남은 주체들의 상호적 열림을 의미하며 이는 자신과 타자에 대한 배려의 마음으로부터 출발한다. 플라톤의 대화편「변론」(2015)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는 자기 배려,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삶이 평생의 과제가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리고 자기배려를 위한 방안으로 대화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대화는 그 과정에서 대화 참여자들의 과거와 현재의 삶이 속속들이 드러나고 지금까지 믿었던 모든 가치들이 전도되는 경험을 하면서 결국 자신의 삶의 전환에 대한 실존적 결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하는 것(Kim, 2009: 35)으로 배움에 이르게 한다. 이는 프레일리(Freire P.)의 프락시스(praxis) 개념을 통해서도 전달된다. 프락시스는 행동과 성찰로 이루어지는 인간 행위로, 대화를 통해 주체들이 서로 협동하여 세계를 변혁하는 데 참여하는 것(Freire, 2002)을 의미한다. 이때 대화는 지배하는 주체와 지배당하는 객체 사이에서 일어나는 위계적 상호작용이 아니라 배려가 내재된 주체들 간의 ‘만남’이다. 또한 이 만남은 사물(대상세계)과 대화하고, 타자(친구 또는 다른 타인)와 대화하고 자기와 대화하는 배움이다(藤田由美子, 2006). 이때 놀이는 이러한 만남을 주선하며 자연스럽게 배움의 ‘터’로 이끄는 매개적 역할을 한다. 다음의 사례에서도 이러한 만남을 볼 수 있다.
실외 놀이에서 주운 나무 막대기를 총 쏘며 사냥하는 놀이의 도구로만 여겼던 1-2세 된 영아들이 교사와의 대화를 통해 자기 성찰이 일어나는 현장이다. 즉 ‘놀이-만남(대화)-배움’의 일련의 과정을 볼 수 있다.
마크: (주워 온 막대기를 자기 친구에게 겨누며)내 총은 살아 있어. 이건 널 죽이고 싶어해!
교사: (자상한 목소리로) 만약 네 총이 살아 있다면 이건 이름을 가져야 해. 네 총의 이름은 뭐니?
마크: (깜짝 놀라면서 조용히 서 있다.)
교사: 그게 너랑 같이 살고 있니? 이 유아학교의 여기 놀이터에서 살고 있니?
마크: (주워 왔던 나무를 가리키며) 이 총의 이름은 에릭이고요. 얘는 저 나무 밑에서 자기 엄마랑 살고 있어요.(Taguchi, 2018: 83-84)
위의 사례는 내부 작용 교육(intra-active pedagogy)에 대한 것으로, 물질적인 것과 담론적인 것이 내부 작용의 역동 속에 서로 연루되며 서로를 함축하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놀이의 실험적이고 관찰적인 특성이 “특개성(baecceity)의 순간, 또는 바로 이것임(just-this-ness)의 순간”(Davies, 2017: 76)으로 발현되면서 새로운 사고를 가능하게 한다는 뒬레즈 식의 해석으로 표현될 수 있다. 말하자면 대화를 통해 ‘놀이-만남’의 순간이 배움을 촉발시키는 순간이 됨을 보여주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발현적 되기(being emergemcy) 그리고 사고하기와 이기(being)의 창조적 진화(Davies, 2017: 68)는 생성적 교육의 한 흐름이자 놀이 중심 교육의 한 목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대화는 다양한 마주침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에너지의 흐름을 복잡계(complex system)로 탈영토화 하는 기제이자, 일종의 담론적 놀이다.
유아들의 놀이는 놀고자 하는 놀이 욕망과 놀이 행위의 부딪침에서 오는 불안정성으로부터 촉발된다. 이때 담론적 놀이는 유아들 사이에서, 유아와 교사 사이에서, 유아와 물질 사이에서 언어적, 비언어적 대화를 통해서 일어난다. 담론적 놀이가 특별한 것은 놀이 그 자체를 훼손하지 않고 교육적 놀이가 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부정적일 수 있는 놀이 욕망을 유아 스스로 놀이 본능이 살아있는 방향으로 전환시키는 그 순간이 놀이의 특개성이 체험되는 순간이자 배움이 촉발되는 순간이며 자기에의 배려가 필요한 순간이다. 이때 유아들의 놀이 본능을 억압하거나 제거하지 않고도 자기 선택에 의한 놀이를 ‘바로 이것임(just-this-ness)’의 순간으로 펼쳐질 수 있게 하는 것이 만남이다. 이러한 만남은 담론적 놀이를 매개로 배움의 놀이터화 되는 특성이 있다.
Ⅳ. 결 론
본 연구에서는 놀이 중심 유아교육 향방에 관한 시론적 접근을 전개하였다. 이를 위해 먼저 후기 산업산회 전후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놀이에 관한 존재론적이며 인식론적인 가치와 의미에 대해 담론화 하였다. 다음으로 놀이와 배움의 조화를 위해서 놀이 정신이 살아있는 배움과 자기에의 배려교육의 중요성을 시론적 차원에서 접근하여 놀이 중심 유아교육의 향방을 제안하였다. 이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후기 산업사회를 전후로 놀이에 관한 인식의 차이가 있었다. 먼저 놀이의 존재론적 가치의 차원에서는 후기 산업사회 이전의 놀이에 관한 인식은 주로 이분법적 논의 속에서 이루어졌으며, 이때 놀이는 주변적이며 부정적인 것으로 다루어졌다. 그러나 후기 산업사회로 진입하면서 ‘놀이, 그 자체’의 존재론적 의미에 대한 관심이 일어났다. 이는 한마디로 ‘놀이에서 놀이 정신’으로 이어지는 담론의 변화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놀이의 본질적 가치의 차원에서는 후기 산업사회 이후에 본격적으로 전개된 놀이 그 자체에 대한 논의를 다루었다. 특히 놀이에 대한 호이징어의 문화적 시각과 카이와의 사회학적 시각을 다루는 것으로 놀이에 대한 사유의 전회와 놀이 자체에 대한 재미와 규칙에 관해 담론화하였다.
다음으로, 놀이 중심 유아교육의 향방으로 놀이 정신이 살아있는 배움과 자기에의 배려 교육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전자의 경우 놀이 정신과 유아들의 놀이 세계, 놀이 특이성과 배움의 ‘터’로써 놀이정신을, 후자의 경우 교육적 놀이와 배움의 주체 ‘되기’, 놀이-만남(대화)-‘바로 이것임’의 순간을 담론화 했다.
이러한 논의들은 후기 산업사회로 들어서면서 ‘놀이, 그 자체’의 무한한 창조성에 대한 재조명적 시각이 놀이 중심 유아교육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 데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놀이를 가장 사소한 것으로 다루었던 근대적 시각에서 벗어나, “세계 자체의 지배를 드러내는 중요한 철학적 주제”(Kim, 2013: 33)로 삼게 했다. 이는 놀이 중심 유아교육에 대한 재조명적 시각을 불러일으키며, 보다 근원적인 차원에서 놀이를 바라보도록 종용했다. 유아교육에서 놀이가 중시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면서 ‘왜 놀이가 중시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자체에 대한 생각조차 잊어버린 채 기계적으로, 또는 친숙한 느낌에 의해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해 온 놀이에 대한 숙고를 불러일으키는 반성적 사고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본 고는 일상 속에서 고정된 것으로 간주해 온 유아 놀이에 대해 문제화하는 것으로, 놀이에 대한 다각적 측면에서의 논의와 실천 가능성을 모색하는데 기여하고자 한다. 특히 성인에 의해 강제되거나 규정되어진 놀이가 아닌, ‘놀이, 그 자체’의 본질적 의미를 살리면서 교육적 놀이가 될 수 있는 방안을 ‘자기에의 배려 교육’에서 찾는 것으로, 유아들의 놀 권리와 배움의 권리를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한 방안을 제시한고 있다는 점에서 본 고의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와 같은 접근은 유아들의 놀이 욕망이 오히려 ‘놀이, 그 자체’의 의미를 살릴 수 있는 ‘터’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유아들의 놀이 욕망을 억압 또는 규제의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배움의 놀이터화로 펼쳐질 수 있도록 놀이교육의 전환점을 다각적 시각에서 찾도록 한다는 점에서도 기여할 수 있다.
그러나 놀이다운 놀이를 교육 현장에서 실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사들의 놀이교육에 대한 이해와 교육자로서의 역량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놀이를 담론화 할 수 있고 놀이교육 실천에 대한 경험적 사례를 공유할 수 있는 교사를 위한 전문적 학습 공동체의 장(field)이 마련될 필요가 있다. 더불어 후속 연구에서는 유아들의 놀이의 특이성과 교육적 만남이 이루어지는 현장 연구와 유아 놀이와 관련된 교사들의 전문적 학습 공동체와 관련된 현장 연구들이 다각적 시각에서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References
- Caillois, R, (1994), Les jeux et les hommes, Lee, SR, (Translation)Soul, Moonye. [https://doi.org/10.2307/40115133]
- Cannella, SG, (2002), Deconstructing early childhood education: Social justice and revolution, You, HL, (Translation)Soul, Changjisa.
- Choi, CW, (2011), Spieltheorie und Kulturanalyse, Researches in Contemporary European Philosophy, 25, p25-52.
- Choi, SD, Yoo, SS, Lee, MW, and Jeon, BW, (2010), A Study on the Policy Direction of Human Resources for Sustainable Growth, A Study on the Korean Educational Development Institute in Korea, CR 2010-28.
- Chung, NR, (2012), Der praktisch-philosophische Sinn des Spiels - im Mittelpunkt der Philosophie Nietzsches, Journal of Korean philosophical society, 122, p317-346.
- Chung, NR, (2014), Das Moderne Denkmodell des Spiels und Nietzsches Kritik - Im Mittelpunkt der Kritik an Schillers Spiel, Nietzsche Study, 26, p7-48.
- Chung, NR, (2016), Spiel und Metaphysik, Nietzsche Study, 29, p7-47.
- Davies, B, (2017), Listening to children: being and becoming, Byeon, YH, Yoo, HY, Yun, EJ, Lee, GH, Lee, YS, and Lom, BY, (Translation)Soul, Changjisa.
- Deleuze, J, and Guattri, F, (2003), Mille plateaux: capitalisme et schizophr nie 2, Kim, JJ, (Translation)Soul, Holywave.
- Foucault, M, (2017), Discours et vérité précédé de la parrésia, Ottremang Shim, SK, and Jeon, HR, (Translation)Soul, Dongnyok.
- Foucault, M, (1999), Histore de la sexualité: tome 3 le souci de soi, Lee, HS, and Lee, YM, (Translation)Soul, Nanam.
- Freire, P, (2002), Pedagogy of the oppressed. Nam KT(Translation), Soul, Greenbee.
- Huizizinga, J, (1993), Home Ludens, Kim YS(Translation), Soul, Kachi.
- Jeong, HS, (2012), Literature review of the research on media in early childhood education focusing on the perspectives on the relationship between media and education, Journal of children’s Media, 11(2), p45-67.
- Jung, H, (2008), The categories and characteristics of educational play:focused on Freinet's ‘play-work’, Journal of educational studies, 39(1), p1-17.
- Kim, KS, (2008), Pioneers of 'Paidology', Study on Play-theory of Huizinga and Caillois, The Journal of the Humanities, 54.
- Kim, YO, (2016), Current status of big data-related study and tasks of early childhood education in Korea, International Journal of Early Childhood Education, 36(6), p181-206. [https://doi.org/10.18023/kjece.2016.36.6.008]
- Kim, JC, (2013), On the Ontology of Play in E. Fink(II)-Play as Symbol of the World, Researches in Contemporary European Philosophy, 33, p33-64.
- Kim, H, (2001), Recherche sur les discours concemant le jeu dans les sciences humaines, Etudes de Langue et Litterature Francaises, 46(1), p165-188.
- Lee, KM, and Yoon, HK, (2017), Critcal Discourse Analysis on The age of 4<sup>th</sup> Industrial Revolution and Implications of Early Childhood Education, International Journal of Early Childhood Education, 37(4), p137-155. [https://doi.org/10.18023/kjece.2017.37.4.006]
- Maffesoli, M, & Lefebvre, H, (Eds.) (2002), The Sociology of everyday life, Daily Nature·Daily Life Research Society, (Translation)Soul, Hanul.
- Nietzsche, F, (2007), Also sprach Zarathustra, Jang, HC, (Translation)Soul, Minumsa.
- Oh, KH, (2013), Exploration on the Re-conceptualization of the Infant Imagination based on the Creative Characteristics of Imagination and Mimesis, Journal of Future Early Childhood Education, 20(4), p125-144.
- Olsson, ML, (2017), Movement and experimentation in young children’s learning, Lee, YS, Lee, KH, Son, YJ, and Kim, YY, (Translation)Soul, Sallrimtur.
- Taguchi, LH, (2018), Going beyond the theory/practice divide in early childhood education: Introducing an intra-active pedagogy, Shin, EM, et al(Translation)Soul, Changjisa.
- Trigg, R, (2000), Ideas of human nature. Choi YC(Translation), Soul, Jajaknamu.
- Veerman, EP, (1992), The rights of the child and the changing image of childhood, -ch, 13, The malta declaration of the child’s right to play(of the international playground association, November, 1977, p369-372, International Studies in Human Rights, Volume 18, Netherlands, Martinus nijhoff publishers.
- Welsch, W, (2005), Grenzgȁnge der ȁsthetik, Sim, HR, (Translation)Soul, Hyangyeon.
- 藤田由美子, (2006), Jugyo wo kaeru gakko wo kawaru, Son, WJ, (Translation)Soul, Educ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