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놀이욕망과 놀이중심 유아교육과정에 관한 소고: 뒬레즈와 가타리의 욕망이론적 접근에서
Abstract
In this study, through the approach of the theory of desire of Deleuze & Guattari, the true play-oriented early childhood education course was enhanced. To this end, we explored the theoretical topography and nature of desire and playfulness. And it was developed in a way that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understanding the convergent characteristics of play free educational play and the importance of 'becoming' in play-centered early childhood education courses. Specifically, this is described as follows.
First, in the approach of desire theory, it made an issue of the desire to generate desire and emphasized Deleuze and Guattari’s nomad flow and ‘Corps sans Organes’(CsO). And in the approach of the play desire, play was regarded as meaningful and valuable in itself and emphasized the autonomy and productivity of the spirit of play and the play desire.
Next, I emphasized that to foster the convergent capacity of free educational play and to become a true play-oriented infant education program, it must be an expressive '-becoming' in each position. It also suggested the need for support in terms of policy, economic and environmental aspects to support teachers' change of perception and on-site practice.
Keywords:
Play desire, Play-centered early childhood education, Desire theory, Convergent capacity of playⅠ. 서 론
지식과 관계의 융합을 지향하는 4차 산업사회에서 놀이는 융복합적 역량을 지닌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 방법이자 교육적 자원으로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이에 교육과정에서도 놀이에 대한 교육적 의미와 가치에 대한 인식, 체험된 것에 대한 비판적 거리 유지에 관해 문제의식을 갖기 시작했다. 특히 유아교육과정에서 놀이의 체험이 실천된 것과 경험된 것이 일치한다고 여겨 온 인식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며 2019개정 누리과정의 구상과 전략을 표명하였다. 이에 개정안을 통해 “유아교육의 본질로서 ‘놀이’의 회복과 강조가 미래형 유아교육과정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는 목소리”(Lim, 2017)를 반영하며 실천적 과제를 제시하였다. 여기에는 진정한 놀이중심, 유아중심의 놀이과정이 수행되기 위해서는 놀이가 제도적 측면뿐만 아니라 이론적인 구상들을 통해 그동안 실제적이지만 인식되지 않아 주변화 되거나 화석화되어 버린 놀이체험에 대한 재조명이 불가피 하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 말하자면 놀이의 교육적 의미와 가치에 대한 왜곡되고 축소된 인식에 관한 것으로, 진정한 놀이의 발현과 체험이 ‘의식되지 않은 억압’의 상태에 머무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개정된 누리과정(안)의 혁신적 성격이나, 현재 유아교육현장에서 체험되고 있는 놀이가 교과중심, 교사중심의 성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는 최근의 지적은 이러한 문제의식으로부터 발로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놀이’에 대한 문제의식이 곧 유아교육과정에서 실천되고 있는 놀이교육 전반을 부정적인 시각에서 보거나 그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교육현장에서 놀이가 그 자체의 본질적 흥미와 자율성이 배제된 채, 이성적·인지적 학습과정이나 교과내용으로 활용될 가능성을 주제로 삼는 것으로, 진정한 놀이가 교육적 놀이로 전환될 수 있는 방안을 현장과 연계하여 찾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놀이의 교육적인 잠재력을 놀이가 발현되는 복잡성 속에서, 유아들이 무수하게 마주하게 되는 기호들과의 내부작용 속에서 배움의 실천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한 것이다. 즉 모든 존재인 기호와 필연적인 관계를 맺으며 민감하게 마주치거나 접속을 하는 것으로 내부작용을 통해 감응이 일어나는 Deleuze식의 배움(Ahn and Kim, 2018)을 조명하는 것이다.
놀이활동이 재미와 자율을 전제로 하는 욕망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놀이자의 놀고자 하는 욕망 없이는 진정한 놀이는 없다. 역사적·구조적 정세와 관련하여 사고할 것을 요구하는 맑스식의 욕망이든, 생산관계의 정세적 규정에서 벗어나 그 나름의 독자적 ‘진실’을 가진 것으로 이해되는 욕망이든(Kang, 1996) 놀이의 본질이 재미에 있는 한 놀이자의 자율적 선택과 참여는 의심없이 받아들여져야 하는 준거 아닌 준거이다. 일찍이 유아들에게 놀이가 삶이자 배움의 장으로 간주되며 유아놀이 교육과정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한 것도 유아교육현장을 유아들의 놀고자 하는 욕망을 실재화하는 장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문제는 놀이욕망에 대한 이해와 실천에서 유아들과 성인들의 인식에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유아들의 놀이는 교사에 의해서 계획되어진 놀이, 즉 이미 만들어진 “홈 패인 공간”(Deleuze and Guattari, 2003)에서의 정적인 것으로 무엇을 성취하거나 적절한 보상을 위해 일정시간 동안 하는 ‘일’과는 구별되는 자유분방함을 가진다. 리좀이 뿌리가 내려있지 않은 지역이라도 번져나갈 수 있는 번짐과 엉킴의 형상을 가진(Deleuze and Guattari, 2003) 것처럼, 유아들의 놀이는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무엇을 하고 놀 것인지가 미리 구상되어 있지 않는 즉흥적인 활동이며,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중첩적이고 파편적인 스토리가 마치 패치워크를 형성하는 활동으로 변화와 생성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특성을 갖고 있다. 이처럼 유아들의 놀이와 욕망은 기획된 것과는 무관하게 흐르는 에너지를 내포한다.
따라서 진정한 놀이중심 유아교육과정의 실천은 유아들의 욕망과 놀이의 에너지의 흐름, 즉 그 자체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으로부터 출발되는 것이 마땅하다.
후기산업사회는 분화된 영역들 간의 경계가 해체되는 탈분화한 사회로, 특히 사회적 삶의 모든 영역에서 끊임없이 무의식적 욕망을 부추기는 욕망의 시대로 볼 수 있다(Jeon and Oh, 2003). 이는 모던사회에서 비이성적이고 비과학적이며 비도덕적이라는 이름으로 거부되어 왔던, 감성, 감각, 감성, 욕망, 상상, 신체와 같은 비이성적이며 소서사적 지식관을 의식이나 담론의 중심으로 세웠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교육 분야에서도 어떻게 가르쳐야하는지에 대해 치중했던 근대적 교육과정에서 벗어나 교육과정마저도 독자적인 물질적 운동으로 간주하며, 주체적 자아의 해체를 선언하는 탈근대적 교육과정으로의 전환을 예고한다. 이때 놀이욕망의 유목적 흐름은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생산적 흐름(Deleuze and Guattari, 2003)으로 간주되거나 전환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제기되며 교육적 담론의 화두로 등장하게 되었다.
놀이는 특히 유아교육과정의 논제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지만 지금까지 교육과정 안에서 이와 관련된 구체적인 논의들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주로 사회철학적 측면에서 놀이 또는 욕망을 다루거나 놀이중심 유아교육과정을 설명하는 한 요인 또는 설명체계로만 다루어질 뿐이었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Deleuze와 Guattari의 욕망이론의 접근을 통해 놀이와 욕망, 놀이욕망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놀이의 교육적 가치와 진정한 놀이중심 유아교육과정의 현실화를 위한 새로운 인식론적인 근거를 제공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욕망과 놀이욕망의 이론적 지형과 본질을 파악하고자 자유로운 교육적 놀이의 융복합적 특성에 관해 기술했으며, 다음으로 현재 지향하는 놀이중심 유아교육과정이 기존의 교육과정과 어떤 차이가 있으며, 이를 통해 진정한 놀이중심 유아교육과정 ‘되기’의 실천적 중요성을 강조하는 입장을 피력했다.
이를 위해 놀이를 “아르키메데스적 과학 또는 과학관과 달리 유목 과학과 같이 삐딱한 방식으로 전개”(Deleuze and Guattari, 2003)하는 Deleuze와 Guattari의 욕망이론의 접근방식을 따랐다. 여기에는 놀이활동을 고정된 사물의 실체가 아닌 흐름으로서 파악하며, 놀이의 흐름을 주체불명의 욕망의 흐름과 관련지어 놀이욕망을 생성과 변화를 추동하는 물질로 파악하고자 하는 의도가 깔려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일련의 질문들과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것으로 지속적인 실험과 운동을 추동해 나갔다. 즉 ‘현재의 유아교육과정이 과연 진정한 놀이중심 유아교육이 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중요한 단서로 삼아, ‘현재의 놀이가 특정한 배움을 위한 지식전달 도구인지?, 아니면 놀이 그 자체로서 즐거움의 대상이자 배움의 과정인지?’에 대한 질문과 ‘유아들의 놀이욕망을 교육적 놀이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제고되어야 할 주체의 해방, 욕망과 배움의 관계’ 등에 관한 문제의식을 제기한다.
이와 같은 질문들은 해답을 주기보다는 새로운 문제제기를 통해 과제를 던지는 방식으로 ‘적어도 무엇이 문제이고 어떤 문제가 쟁점화 되어야 할지’에 대해 지속적으로 고민하게 만든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현장의 실험적 상황이 자연스럽게 생성의 방향으로 전개되도록 인식론적 확장을 가져오는 데 기여할 것이다.
Ⅱ. 욕망의 본질과 놀이욕망
1. 욕망의 본질
1960년 이전의 욕망에 관한 담론은 주로 헤겔(F. W. F. Hegel)의 담론을 근거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헤겔에게 있어 욕망은 타자의 부정이며 타자를 동일화하는 행위 즉, 타자부정적인 동일화의 원칙으로 사고하는 것으로, 주체 이외의 일체의 존재를 부정한다(Kang, 1996). 그러나 1960년대 후반 이후 욕망은 논의 대상뿐만 아니라 지켜야 할 가치로 떠오르며 학계의 쟁점을 형성했다(Kang, 1996). 이는 1960년대 후반의 체제 문제와 결부된 신좌파 운동의 쟁점 중의 하나로 서구 자본주의와 동구 사회주의 양쪽의 두 억압 체제에 대한 저항적 의미와 함께 욕망이 쟁점으로 부각, 이론적 지형에 변화가 일어났다. 뒬레즈(G. Deleuze)와 가타리(F. Guattari), 리오타르(J-F. Lyotard), 바르트(R. Barthes), 보드리야르(J. Baudrillard) 등, 많은 철학자들이 욕망에 관한 논의들을 쟁점으로 내세웠다.
그 가운데에서도 뒬레즈(G. Deleuze)와 가타리(F. Guattari)는 자본주의 사회의 파시즘적 측면을 보다 근본적으로는 우리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에 노예적으로 순응하는 우리 내면의 파시즘이 파시스트적 억압을 가능하게 하고 우리의 일상적 사고와 행동에 깊이 스며들고 있음을 비판한다(Jeon and Oh, 2003). 그러나 한편으로는 계급투쟁의 정치를 대체하는 파시스트적 욕망의 정치가 욕망의 생산성을 핵심 주제로 삼는다고 보았다. 이는 기존의 이성중심의 철학에서 욕망을 존재의 결핍 또는 쾌락의 본질로 간주하며 억압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과 달리 욕망의 생산성을 파악하는 것으로 욕망을 억압의 대상으로부터 해방, 생성하는 욕망으로 인식의 전환을 가져왔다. 특히 Deleuze와 Guattari에게서 욕망은 언어적 질서로부터 부여된 기호나 사회구조 또는 이데올로기가 힘으로 작용하는 역학관계와도 무관한 에너지의 흐름인 것이다. 요컨대 이들에게 있어 욕망은 어떤 것도 결여하지 않으며 오히려 욕망에서 상실한 것은 주체이거나 고정된 주체를 결여한 욕망이다(Kang, 1996). 그리고 욕망의 흐름은 ‘계속되는 물질적 흐름’ 또는 ‘어떤 종류의 물질이건 이상적으로 가져야 할 순수한 연속성’을 지칭하는 질료로 상정된다(Kang, 1996).
욕망은 스스로 생성하고 무한한 네트를 창조해 내는 것으로 한 곳에 정착하기 싫어하는 리좀적인 운동의 성격을 지니며, 무질서나 혼란으로 간주될 수 있는 분열적 흐름(schiz flow)이자 유목적 흐름(nomadic flow)으로, “주체와 무관한 에너지의 흐름라는 점에서 인격적 주체 개념이나 의식적 주체 개념을 부여할 수 없는 기계적 흐름이다”(Jeon and Oh, 2003). 이러한 흐름은 언제든지 욕망의 범주를 변경하여 욕망을 주체에게 귀속시키는 매커니즘을 벗어나게 한다는 점에서 지속적인 생성의 흐름이다. Deleuze(2016)는 욕망을 <기계> 개념을 통해 신체, 회화, 소설 등과 같은 대상으로 분석했다. 그의 <기계> 개념은 두 가지 측면에서 고찰될 수 있다. 하나는 의미의 문제가 아니라 사용의 문제임을 함축한다. 또한 사용의 문제는 합법적 사용과 비합법적 사용을 문제 삼으며 욕망을 일종의 기계 장치로 본다. 말하자면 그 용법이 무엇인가, 어떤 사용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는가를 문제 삼는다. 이는 욕망의 문제를 의미가 아니라 사용에 두는 것으로, 무엇을 사용하며, 어떤 사용 목적을 가지며.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는가를 문제 삼는 것이다. 즉 기계는 올바른 사용법을 찾는 사유 방식으로, Deleuze의 용어로는 새로운 <사유의 이미지>를 생산해 낸다.
다른 하나는 정신 분석학, 정치학과 관련하여 사용된 기계 개념을 <정태적 구조>와 반대되는 의미 사용되는 것으로 정태적이며 공시적인 구조가 아니라, 통시적으로 어떻게 하나의 구조가 파괴되고 다른 구조로 진행해 나가는가를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다. 이때 무의식적으로 흐르는 욕망을 Deleuze(2016)는 “욕망하는 기계(machine désirante)”로 부르며, 하나의 구조에서 다른 구조로 이행하는 기계의 운동성으로 간주하며 욕망 그 자체가 지닌 능동적인 힘에 관심을 두었다. 욕망하는 기계는 욕망의 에너지를 통해 재영토화와 재코드화 되어 식민화된 것으로부터 탈주 가능성을 찾으며, “내재성의 장에서 흐름과 종합을 반복하는 생성이자 일의적 존재의 힘을 상이한 강도로 분유하는 실재 자체이다”(Kim, 2006).
이러한 욕망하는 기계는 강렬하고, 형식을 부여받지 않았고, 지층화되지 않은 물질, 강렬한 모체, 강렬함=0인 기관없는 몸체, CsO이다(Deleuze & Guattari, 2003). 여기서 영점은 결핍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받치매와 앞잡이로서의 충만한 몸체의 긍정성을 표현한다(Deleuze, 2016). CsO는 유기체에 인접해 있으며 유년기와 연결되어 탈지층화 된 하나의 물질로 현재적인 체험이나 실험을 구성하며 유년기의 블록이고 생성이다(Deleuze and Guattari, 2003). 여기서 기관들은 CsO위에 분배되어 있지만 유기체와는 독립적으로 분배되며, CsO는 고른판 또는 욕망의 내재성의 장으로 단지 강렬함의 차이를 통해 표현될 뿐이다. 생산적인 욕망이 실재 세계에서만 생산적일 수 있다는 점에서 Cso의 강렬함의 이미지 표현은 생산적인 욕망의 실재화이다.
2. 놀이욕망
이성과 노동이 중시되는 근대사회에서 놀이는 욕망과 마찬가지로 단지 억제되고 금지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그러나 탈근대 사회에서 놀이는 퇴보의 의미보다는 놀이 그 자체로서 고유한 하나의 장으로 해석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놀이정신을 과학적 이성과는 다른 범주로 상정한 호이징어(J. Huizinga)의 시각”(Kim, 2001)이 영향을 미쳤다. 즉, 놀이를 ‘놀이 아닌 어떤 것과의 비교’로부터 파악하기 보다는 ‘그 자체로 놀아지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놀이를 어떤 특정한 목적을 위한 수단이나 인간과 별개의 어떤 것으로 간주하기보다는 놀이의 본래적 의미의 기능을 찾는 것이다. 이를 위해 Huizinga는 놀이를 문화의 영역으로 확장했으며 이는 문화분석적 차원에서 놀이분석을 정교화 하고자 시도한 카이와(R, Caillois)에 영향을 미쳤다. Caillois는 놀이 그 자체의 존재론적 질문과 자율성을 파악하기 위해 문화분석적 차원에서 여러 형태의 놀이 그 자체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했다(Choi, 2011). 그는 먼저 놀이를 그 수행 원리에 따라 4가지로 범주화(Kim, 2001)하고, 놀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놀이의 내적 상태를 6가지 요소로 놀이를 분류했다(Choi, 2011). Caillois(2003)는 놀이분석을 통해 놀이의 목적이 놀이 고유의 특성인 놀이 그 자체의 자유로움과 재미에 있으며, 이를 위해 놀이규칙과의 균형이 중요함을 강조했다.
Huizinga와 Caillois의 놀이에 대한 문화적 접근은 근대적 담론 속에서 주변적 존재로 밀려나 있던 놀이를 중심부로 끌어내어 놀이 담론을 재평가하고자 했던 Kant와 Schiller의 논의에서 미흡했던 놀이 자체의 본질에 대한 접근이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들은 Kant가 놀이를 자유로운 정신과 그로부터 나오는 창조성에 근거를 둔 ‘생산적 상상력’ 역할을 강조한 것이나, Schiller가 놀이의 형식충동과 감성충동의 조화에서 발생하는 예술의 가능성을 찾고자 했던 것(Jung, 2016; Oh, 2019; 재인용)을 넘어서, 놀이의 자율성과 “문화 자체를 놀이의 한 형태(subspecie ludi)”(Choi, 2011)로 보고자 했다.
한편, 놀이에 현대적 가치를 부여하며 놀이정신이 담긴 놀이철학에 대한 관심은 니체(Netzsche)의 일원론적 방법론인 ‘힘에의 의지’ 에 기반한다. 니체의 ‘힘에의 의지’란 세계의 모든 과정을 힘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보는 것이다.여기서 ‘힘에의 의지’란 단순히 물리적 힘을 넘어서 존재하는 삶 전반에 흐르는 힘의 방향을 지시하는 힘에의 의지로 중심이 하나가 아니라 다수이다(Oh, 2019). 특히 니체의 힘에의 의지는 이상적 인간형인 위버맨쉬(Übermensch) 통해 드러내며 놀이정신의 의미를 전달한다. 말하자면 세계 자체의 현상을 놀이로서 해명하고자 한 것으로, 헤라이클레이토스의 단편 B52에서 ‘세계운행은 이리 저리로 놀이판을 깔고 놀이하는 아이이며, 아이의 왕국’으로 언급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존재자 전체는 지배하는 세계로서 놀이하는 아이(pais paizon)의 상징으로 비유되며, 세계는 놀이로서 지배한다(Kim, 2013). 여기에는 해방된 개인(emancipated individual)을 추구(Trigg, 2000)하는 놀이하는 인간인 호모 루덴스의 열망이 내재되어 있다.
놀이가 욕망의 한 영역이냐, 아니면 놀이의 근원적 에너지의 한 배치냐에 따라 그 접근에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즉 전자는 욕망을 놀이주체로 탈주시키는 놀이욕망으로, 후자는 비록 욕망 자체에 대한 보다 가시화된 실재를 정의하는 것이 선결되어야 하지만 욕망에 관한 놀이, 욕망을 주체로 삼는 놀이라고 할 수 있는 욕망놀이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본고에서 논의의 대상은 놀이욕망으로, 주체에게 귀속되기보다는 놀이 그 자체가 목적이자 근거가 되는 “놀이자 없는 놀이”(Spiel ohne Spielers)(Jung, 2016)의 욕망이다. 말하자면 놀이욕망은 결코 길들여질 수도 없고 길들여지지도 않은 순간적이면서도 강렬하며, 예측 불가능한 실험을 예고하여 놀이에 몰입하는 놀이자들이 지속적으로 생산해 내는 놀이를 향한 에너지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놀이와 즐거움을 찾는 존재(Maffesoli and Lefebvre, 2002)이고, 놀이의 본질이 자유로움과 즐거움이라면, 놀이욕망은 부정될 수 없는 존재론적 가치를 지닌다. 놀이욕망에 대해 이러한 시각은 인간의 활동이 생산과정으로만 환원되지 않는다는 탈근대적 사고로 “생산은 파괴에 종속되어 있거나 부차적이며 사람들은 낭비하기 위해서 창조한다”(Kang, 1996)라는 소비중심의 사고, 즉 소비가 곧 창조의 원천이 될 수 있다라는 역발상적 사고가 받아들여지면서 부터이다. 이러한 놀이욕망과 생산성에 대한 사고의 전환은 다른 차원에서의 문제제기에 기여했다.
발리바르(É. Balibar)의 표현을 빌리자면 욕망은 해방의 원리, 즉 해방을 요구하는 진리로 파악(Kang, 1996)되었으며, 억압가설 위에 놓여있던 놀이욕망도 욕망의 해방의 원리 선상에서 해석되었다. 특히 Deleuze와 Guattari는 정념적이며 욕망의 편성인 ‘배치’의 개념을 통해, 욕망을 자연적이고 자발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배치하고 배치되는 것이자 기계적인 것으로 욕망의 실재를 설명했다. 즉 무기와 도구가 기계적·집단적 배치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놀이욕망 역시 배치에 의해 편성되고 ‘욕망하는 기계’는 ‘배치’를 만든다(Deleuze and Guattari, 2003)는 것이다.
‘배치’의 합리성이나 효율성은 이러한 배치가 유도하는 정념들 없이는, 또 이러한 배치를 구성하는 동시에 이러한 배치에 의해 구성되는 다양한 욕망들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정념이란 배치에 따라 달라지는 욕망의 현실화이다. 따라서 배치에 따라 정의(正義), 잔혹함, 연민 등이 달라진다.(Deleuze and Guattari, 2003: 767).
문제는 놀이욕망을 실재적인 측면에서 다루게 되는 순간, 놀이욕망이 생물학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으로 되어 결핍 또는 억압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이며, 이로 인해 놀이욕망은 생산성과 양극단의 위치에 점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는 점이다.
Ⅲ. 자유로운 교육적 놀이와 놀이중심 유아교육과정
1. 자유로운 교육적 놀이: 융복합적 역량
1980년대 이후로 사회전반의 지식 인프라 구축의 보편적 현상이 되고 있는 지식 융합현상은 자연이나 사물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본질 규정이 이루어지는 인식론적이며 방법론적인 문제로, 지속적인 변화의 생성을 추동하는 것과 동시에 추동의 근거가 되고 있다. 지식 융합현상은 독자적인 학문의 영역을 개방하여 학문 간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다양한 형태로 교육담론을 재구조화하는 것으로, 이를 위해 지식의 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창의적이고 유연한 사고를 지닌 인재 양성을 교육과제로 삼는다. 그런데 지식의 융합은 보다 다양한 수준(또는 다차원적 수준)에서 관계적 융합을 동반하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다. 이와 같은 견지에서 인지적으로는 창의적이고 비판적인 능력을, 정서적으로는 감수성을 지닌 인성을, 사회적으로는 공동체의식을 지닌 인재 양성이 최근 교육의 중심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특히 복잡계 과학시대의 다양한 종류의 요구를 동시에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상호 이질적인 것의 경계를 해체하고 모호함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영역의 지식 세계를 생성하는 융복합적 역량을 지닌 인재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적 변화와 요구에 ‘교육은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할 것인가?’. 즉 ‘융복합적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과정은 어떠해야 하는가?’이다. 이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는 ‘융복합적 역량’이라는 개념적 의미에서 어느 정도 찾을 수 있다. 융복합적 역량은 한편으로는 지식과 관계의 융합을, 다른 한편으로는 파편화된 다양한 주체들을 배경으로 ‘보편적인 것’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일을 일상화하는 고차적 역량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열린 장(field)에서 몰입 경험을 통해 자연스러운 배움에서 갖게 되는(Choi et al, 2010) 역량이다. 그리고 융복합적 역량을 배움의 중심에 두는 교육과정이 본질적으로 생태중심적인 특성을 지닌 교육이라는 점에서 놀이중심 교육과정과 일치한다. 놀이는 본질적으로 재미를 추구하기 위한 자발적 행위이라는 점에서 강제성이 없는 자연적인 현상이며 “시공간을 초월한 불역성과 그 자체로서 모든 에너지를 소진시키는 활동이자 일의 속성”(Jung, 2008)을 지닌다는 점에서 Deleuze와 Guattari의 생성적 에너지의 흐름이다. 무엇보다 놀이경험은 세계의 지속적인 생산과 불안전성을 설명할 수 있는 ‘야생의’ 초험적 경험론을 통해 사고의 조건을 만들어내며 경험적 자료 자체에 노출되어 있다(Olsson, 2017). 이는 유아들의 놀이욕망을 교육적 경험으로 전환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나타낸다. 놀이의 본성이 특정한 정신적 상태가 아니라 표현하는 행위이라는 점에서, 유아교육과정 내에서 놀이를 어떻게 제시, 설계, 체험하게 하느냐에 따라 놀이경험도 융복합적 역량을 기르는 교육적 자원이 될 수 있다. 따라서 현재 유아교육과정에서 실천되고 있는 놀이 중심의 활동이 놀이의 본질적 의미를 담아내는 진정한 의미에서 유아중심, 놀이중심 교육인지에 대한 재검토가 필연적 과제로 남는다. 놀이는 그 자체가 내재하고 있는 고유한 어떤 것이라는 점에서 놀이인 것과 아닌 것의 구분은 없지만, 놀이가 교육적 활동이 될 때 과연 놀이가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규정과 법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 제기될 필요가 있다.
놀이경험이 융복합적 역량을 기르는 교육적 자원이 될 수 있기 위해서는 흥미와 재미가 살아있는 놀이활동이 자연스럽게 배움과 연계되어야 한다. 문제는 ‘교육과정 속의 놀이가 어떠한 강제성이나 구속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지?’이다. 왜냐하면 놀이의 비진지함이나 놀이의 본성인 재미와 흥미를 일으키는 요인인데, 교육적 놀이가 된다는 것은 ‘교육적’이라는 제한 내에서 허락되어진 놀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어떠한 경계도 허락하지 않는 놀이, 심지어 교육적인 것과 비교육적인 것 까지도 무마시키는 놀이의 본성을 어떻게 규범적 특성을 지닌 교육과정 속에서 그 본성을 잃지 않게 할 수 있는지를 의문시하는 것이다.
특히 유아들의 놀이세계는 다양한 재료를 활용하거나 스토리를 만들어 내는 것으로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무화시키는 활동이 주(主)가 되고 있으며, 놀이과정에서의 지속적인 장면의 변화를 통해 놀이의 ‘흥미(興味)’를 생산해 내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Oh, 2013). 이와 같은 맥락에서 카이와(R, Caillois) 역시 유아들의 놀이세계를 흥미와 몰입이 전제된 ‘놀이,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고 있는 일상과 다른 창조된 세계로 보았으며, 이 세계에서 현실의 법은 중단되며 일시적으로 새로운 입법이 창설되는 ‘별도의 세계(un monde ἀ part)’(Kim, 2001)를 나타낸다고 보았다. 이처럼 즉흥적이며 자유로우며 복잡성을 지닌 유아놀이의 본성을 교육과정 속에서 살리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이를 다른 측면에서 접근하면 유아들의 놀이세계가 단순히 성인세계를 반복하는 플라톤(Plato)의 시뮬라크르(simulacre)적이기 보다 재현하는 주체, 즉 유아 주체가 반영된 놀이로 또 다른 의미화의 과정이자, Deleuze의 드라마적 특성을 지님을 발견할 수 있다. Deleuze는 드라마를 관념이 궤적인 개념으로 전환되는 과정, 즉 잠재태인 관념이 시공간적 차원으로 물리화되는 역동의 과정으로 보았으며, (우연적인) 놀이에 의해 발생되는 의미작용으로 재정의 되는 사유과정 자체로 보았다(Kim, 2001). 그의 사유과정은 어떤 중심이나 일정한 체계 없이 생성되고 접합되는 형식의 사유인 리좀적 사유가 모든 것을 하나로 통일하는 중심으로부터 벗어나 기존의 틀을 부수고 다양성과 창조성을 지향하는 삶으로 나아갈 것을 제안하는 매끄러운 공간의 본성을 토대로 삼는다(Deleuze and Guattari, 2003). 이러한 사유방식은 유아들의 놀이를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현실태로 인식하며, 사유에 의해 형성되는 경험적 세계로 인식하며, 그리고 매끄러운 공간에서의 ‘자유로운 행동’을 놀이의 실험적인 특성을 나타내는 “번짐과 엉킴의 형상을 가진 리좀적인 것”(Deleuze and Guattari, 2003)으로 인식하게 한다. 이러한 Deleuze와 Guattari의 사유방식은 자유분방하고 리좀적인 유아놀이의 특성을 계획적이고 목적지향적이며 체계적인 교육과정과 만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즉 놀이가 배움이 되고 배움이 진정한 놀이가 될 수 있는 방안이 유아놀이 그 자체에서 찾을 수 있음을 예측하게 한다. 예컨대 성인들에게 전(全) 유아교육과정은 놀이과정이지만 유아들에게는 다를 수 있다는 점이다. 유아들에게 유아교육과정 속의 놀이는 ‘교육적인 것과 비교육적인 것’보다는 ‘(그냥) 놀이와 재미있는 놀이’로 구별될지 모른다. 그렇다면, 계획적인 놀이의 구속성마저도 유아들에게 즐거움이 될 수 있다면, 즉 놀이가 ‘자유로운 구속적 특성’을 지닌다면, 놀이의 본성이 살아있는 놀이와 교육적 놀이가 별개일 수 없다.
2. 놀이중심 유아교육과정: ‘되기’의 유아교육
2019개정 누리과정안은 2015 누리과정의 문제점을 진단하는 것으로, 유아들에게 놀 권리와 배움의 권리를 돌려주고자 하는 데 있다. 2019개정 누리과정안에서 새롭게 제안되고 있는 유아중심, 놀이중심 유아교육과정은 유아놀이의 도구적 역할에 대한 반성과 근대적 시각에서 접근하고 있는 놀이교육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개정 취지의 근거로 삼고 있다.
그동안 유아교육과정에서 놀이는 ‘유아교육=놀이교육’이라는 정식을 당연시할 만큼 교육과정의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또다시 놀이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유아교육개혁안’에서 누리과정을 ‘놀이중심 교육과정’으로 개편해야 함을 기조로 삼는 것은 놀이교육의 정책적 측면과 실천적 측면에서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실제 유아교육 현장에서 놀이는 놀이정신이 살아있는 놀이로 실천되기 보다는 “교육목적을 달성하는 교육수단으로, 교사 주도하에 수업활동 내에서 이루어지는 놀이”(Chon and Ohm, 2011)로, ‘놀이시간’ 이라는 교육과정 속의 프레임적 의미가 강하다. 최근 국회토론 자료집(Lim et al, 2017.12.31.)에 거론된 2015누리과정의 문제점에서도 이러한 점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교육과정의 내용과 형식과 교육과정 구성 체계에 관한 것으로, 무분별한 대·소집단 활동의 개발 및 보급과 교과와 발달을 표방한 5개영역, 생활주제와 교육내용의 혼선, 일과표와 대소집단 활동유형의 교과화, 자유선택활동을 위한 교실환경(흥미영역)의 학습공간화에 관한 것은 누리과정의 편성과 운영을 재기술 할 것을 요구하며, 주제, 지식, 기술, 태도, 흥미영역과 같은 놀이를 규범화시킬 개연성있는 단어를 삭제하고, 놀이를 구조화·인지화시킬 수 있는 교재교구의 대체를 요구하며, 자유놀이와 바깥놀이를 핵심교과로 배치하는 구성 체계를 정비할 것을 제안하며, 학습자가 즐거움을 가지는 교육내용과 방법으로 놀이중심 교육과정의 의미를 명료화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정책적 측면에서의 재고는 그동안 현장 실천적 측면에서의 문제를 논제로 삼은 것이다. 예컨대 수업활동과 놀이 활동으로 구분되어있는 일과에서 일일 1시간 이상의 자유선택활동과 바깥놀이 활동으로 구성되어 있는 놀이활동이 수업활동처럼 교사 주도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때 놀이는 또다른 수업의 한 형식으로, ‘놀이 그 자체’의 본질적 의미가 실천되기보다는 교과내용으로서, 또는 교과적 내용을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수단으로, “놀이의 ‘비-진지한 것, 비-의무적인 것, 비-본래적인 것’으로서 부정성(‘비-’)을 가진 경계에서 규정되며, 분방하고 한가로운 것으로서 ‘노동’, 삶의 진지함과의 대립에서 파악되는 ‘놀이’”(Jung, 2012)의 고유한 특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렇다고 교사 주도적 놀이가 비교육적이고 유아 주도적 놀이만이 교육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놀이 자체의 탈중심적인 의미가 제거된 놀이는 놀이 그 자체가 지닌 재미와 흥미뿐만 아니라, “Schutz가 거론하는 고유한 인식 양식을 갖는 한정적 의미 영역의 각각의 현실인 ‘복합적 현실(multiple realities)’”(Kang, 1998)을 파악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진정한 놀이는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일부(또는 그 자체)이며, 놀이교육은 “일상생활세계의 경험들과 이를 초월하는 다른 의미 영역들에 속한 경험들을 연결하는 상징들에 관한 분석을 시도”(Schutz, 1973; Kang, 1998)하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요컨대 진정한 놀이교육은 과학적 이성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놀이정신이 살아있는 놀이 활동, 즉 지속적인 변화와 창조를 생성해내는 탈주적인 흐름을 이끌어내는 초월적 정신이 담긴 놀이정신이 살아있는 놀이 활동을 통해 가능하다.
유아중심, 놀이중심의 유아교육과정이 현장에서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위치(position)에 대한 파악이 중요하다. 위치란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우리가 어떻게 다르게 분할되는 것인지를 이야기한다(Olsson, 2017). Olsson(2017)에 의하면 Deleuze와 Guattari의 ‘미시정치학’과 ‘분할성’이라는 개념이 운동을 위치에 선행하는 욕망과 신념의 양자들이자 흐름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기술한다. 욕망과 신념의 흐름 속에서 실험은 운동으로 나타나는데 여기서 위치로 분할되어 분할들 사이의 틈에서 탈주선을 생산한다는 것이다. 이때 분할성은 Deleuze식의 설명에 따르면, 선형적인 경계가 아니라 전체 장을 가로지르며 뒤엉켜 동시에 존재하는 그 사이에 나타난 탈주선이 변용과 생성을 지속시킨다(Deleuze and Guattari, 2003). 또한 Deleuze의 존재의 일의성(一義性)과도 연관되며 교육적 차원에서 설명될 수 있다. 예컨대 교육에서 널리 행해지고 있는 이분법적 구분을 넘어서서 다른 모든 것과 공존하는 상호적 상태에서 인간 존재의 관점에서의 변화와 발달을 융합하는 윤리로 교육 실제를 변형할 수 있다(Taguchi, 2018). 특히 놀이중심 교육과정은 다양한 위치의 퀼트로 비유될 수 있다. 출발점도 도착점도 없는 끝없는 되기(=생성)로 마치 바둑이 공간을 영토화하고 탈영토화하는 것(Deleuze and Guattari, 2003)과 같이, 놀이 활동은 열린 공간에서 각자의 위치가 분할되어 공간을 확보하기도 하고, 어떤 지점에서 다시 출현하는 가능성을 내포하기도 한다. 이때 교사는 하나의 배치로서 놀이가 ‘놀아져야 하는 것’으로부터 ‘놀아지는 것’으로 위치성(positionality)을 갖도록 다양한 욕망들의 분열을 일으킨다. 분열은 자아에 대한 고정된 규준이나 이미지에 지배당하지 않는다. 즉 법에 종속되어 있는 자아가 아닌, 흐름과 생성 속에서 자아의 삶을 사유하는 방식(Davies 2017)으로 작용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점에서, 분열은 “차이를 감지하게 하여 새로운 자기-조직화와 자기-생산의 과정을 불러일으키는”(Olsson, 2017) 또다른 방식의 변화와 생성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분열이 놀이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다루어지는 것은 놀이자의 선택이 한 방향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교사의 역할은 공동의 실험자-‘되기’이다. 교사가 유아들의 놀이욕망이 교육적 방향을 향해 영토화하고 탈영토화 할 수 있도록 잠재성과 역량에 도전하는 공동 수행자가 되어야 한다. 이때 교사의 수행이 “차원수가 분수 또는 비정수인 집합 또는 차원수가 정수이면서 방향이 연속적으로 변주되는 집합을 가르키는 프랙탈”(Deleuze and Guattari, 2003)적 특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반복과 차이를 동시에 가진다. 이는 교육과정의 특성과도 유사하다는 점에서, 놀이중심 유아교육과정에서도 교사의 역할은 교육실천의 성패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다.
이처럼 배치가 어떤 것도 특정 누군가에게 속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 사이에 놓여 있는(Olsson, 2017) 기능을 하는 것처럼 교사도 “부분들을 관통하는 힘을 통해 상태를 변화시키고 그 속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Davies, 2017) 배치적 역할을 한다. 마치 땅속 창고에서 아이들이 무언가를 가져와서 놀이를 시작할 때 블록을 옮기면서 생성이 시작되며, 시작 후 어떤 것도 특정 누군가에 속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 속에 있게 되는 유아들의 리좀적인 놀이의 변용태(Olsson, 2017)처럼, 교사 역시 배치의 특성으로 발현적인 주체 ‘-되기’에 위치성을 갖는다. 배치는 교사-되기, 놀이-되기, 유아-되기, 진정한 놀이중심 교육과정-되기 등 다양한 주체-되기가 확대되어 나가는 데 기여한다. 그러나 스스로를 이겨내고 규범적인 언어와 일상의 위력에 저항하는 발현적 주체 ‘-되기’(Davies 2017)는 하나의 기준을 무조건적으로 수렴하기보다는 여러 차원에서 서로 다른 위상에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을 찾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몰입은 이러한 찾기의 전(前)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놀이가 사건을 물질로 물질을 현상으로 만드는 순간, “매 순간 무언가를 창조해내는 특개성(baecceity)의 순간”(Davies, 2017)을 마주할 수 있는 것은 몰입과 찾고자 하는 열망에서 발현된 동요에 의해서이다. 이러한 동요가 바로 배움의 순간을 마주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Deleuze에게서 배움은 일차적으로 물질과의 만남 즉 감각적 만남을 의미하며, 이 감각적 만남은 표면적인 물질성이 아니라 이를 발생시키는 심층적인 물질성으로, 기호와 마주칠 때 분명한 현상을 의식하기보다는 모호한 기운이나 감각적인 느낌을 갖는 것이다(Kim, 2004). 이러한 개개인의 기운이 공동의 감응된 힘(the effective flow)으로 확장되기 위해서는 찾기를 통한 만남의 과정이 있어야 하며, 만남의 순간이 교육적 힘으로 발현되는 순간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이때 놀이 활동은 모든 주체-‘되기’의 교육적 놀이가 된다.
Ⅳ. 결 론
본 연구에서는 Deleuze와d Guattari의 욕망이론의 접근을 통해 진정한 놀이중심 유아교육과정의 현실화를 위한 새로운 인식론적인 근거를 제공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욕망과 놀이욕망의 이론적 지형과 본질을, 그리고 자유로운 교육적 놀이의 융복합적 특성과 놀이중심 유아교육과정 ‘되기’를 문제적 접근에서 탐색하였다. 이를 구체적으로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욕망이론과 놀이욕망의 측면이다.
첫 번째, 욕망이론적 접근에서, 1960년대 이후 욕망의 이론적 지형이 존재의 결핍에서 에너지의 흐름으로 파악됨에 따라 억압의 대상으로부터 해방되어 생성하는 욕망(또는 욕망의 생산성)이 쟁점화 되었음을 기술했다. 또한 욕망의 본질을 스스로 생성하고 무한한 네트를 창조하는 리좀적 운동의 성격을 지닌 유목적 흐름으로 파악했다. 그리고 욕망을 욕망하는 기계로서 그 자체가 능동적인 힘을 가진 지층화되지 않은 물질, 즉 강렬한 모체인 기관없는 신체(CsO)임을 강조했다.
두 번째, 놀이욕망의 접근에서, 놀이는 탈근대사회로 진입하면서 놀이 그 자체로서의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간주되었음을 기술했다. 놀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놀이의 자율성과 세계 상징으로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놀이정신에 관심을 두게 했으며, 욕망의 배치에 따라 정서적 측면과 실재적인 측면이 달라지는 놀이욕망의 생산성과 위험성이라는 양가적 특성을 파악할 수 있게 했다.
다음으로, 자유로운 교육적 놀이의 융복합적 특성과 놀이중심 유아교육과정 ‘되기’에 관한 것이다.
첫 번째, 자유로운 교육적 놀이의 융복합적 역량에 관한 것으로, 복잡계 과학시대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교육적 역량은 놀이의 본성이 살아있는 교육적인 활동에서 획득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왜냐하면 놀이의 본성인 흥미와 재미가 살아있는 자유로운 활동은 다양한 놀이자들과의 자연스런 관계를 통해 일어나는데, 이때 “재미가 살아있는 배움”(Oh, 2019)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지식과 관계의 융복합적 역량은 놀이의 본성인 흥미와 재미가 살아있는 놀이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배움으로 전환되는 순간, 즉 “놀이가 혁명”(Kim, 2001)이 되는 순간을 인식하게 하는 과정으로 연결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놀이중심 유아교육과정 ‘되기’에 관한 것으로, 2015 누리과정의 문제점과 이를 진단한 2019개정 누리과정안을 근거로 교육과정의 정책적 측면과 실천적 측면을 본 논문의 이론적 근거로 삼고 있는 Deleuze와 Guattari의 시각에서 해석했다. 즉 진정한 놀이가 살아있는 유아교육과정이 현장의 실천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변화와 창조를 생성해내는 리좀적 사고와 초월적 정신이 담긴 놀이정신이 반영된 놀이활동이 실천되어야 한다. 그런데 놀이정신이 살아있는 놀이 활동이 교육적 놀이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욕망과 신념의 흐름 속에서 실험이 운동으로 나타날 수 있도록 분할된 위치 사이의 틈에서 탈주선을 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유아들의 리좀적인 놀이의 변용태(Olsson, 2017)가 교육적인 힘으로 발현되는 순간으로 전환되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개인의 기운이 공동의 감응된 힘으로 확장되면서, 각 위치에서 발현적인 주체 ‘-되기’가 생성 의 과정 속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진정한 놀이중심 유아교육과정이 실현되는 순간임을 강조했다.
2019개정 누리과정안의 시행에 따라 ‘유아중심, 놀이중심 교육과정’에 대한 관심이 촉발되고 있다. 여기에는 무엇보다 재미와 즐거움을 추구하는 놀이욕망이 과연 미래지향적인 교육과정의 교육적 자원으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제기와 충분한 타진의 요구를 반영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유아교육에서 놀이가 중시되는 만큼 놀이와 놀이욕망, 놀이욕망의 교육적 자원화, 이를 위한 진정한 놀이중심 유아교육과정의 실천과 배움의 본질적인 성과 등에 관한 논의들은 지속적인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사회의 변화의 흐름을 반영하고 때로는 반영시키기도 하는 교육의 과정을 숙고한다면 유아교육과정에서 놀이는 유아교육지체 현상을 점검하는 하나의 기준 역할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에 본고에서 거론한 유아들의 놀이욕망과 교육적 놀이, 이를 실질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유아교육과정에 관한 논의들은 근원적으로 놀이활동이 유아교육과정에서 실질적인 배움의 본질임을 재차 강조하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유아들의 놀이가 사유에 의해 형성된 경험적 세계를 기반으로 한 현실태임을 강조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시공간을 초월한 불역성과 그 자체로서 모든 에너지를 소진시키는 활동이자 일의 속성을 지닌 유아교육과정 속의 놀이(Jung, 2008)는 배움의 본질인 ‘되기’의 한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떠한 구속도 받지 않는 현실의 자유로움 속에서 오로지 흥미와 몰입에 의해 자연스럽게 생성된 놀이가 교육과정 속에서 과연 어떻게 지속될 수 있으며, 또한 교육적 놀이로 어떻게 전환될 수 있을지?, 그것을 또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지?’ 등에 대한 질문들은 해결해야 할 과제이자 해결의 실마리이다. 문제제기의 근저에는 “교사의 신념과 실제 교육적용에 있어서 차이”(Moyles, 1989; Polito, 1994)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과제와 ‘과연 이 문제는 한 가지 답으로 해결될 수 있는지?’에 대한 또다른 질문이 존재한다. 한 마디로 ‘교사의 자율성과 개별성을 인정하고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만약 교사의 실천의식이 곧 놀이중심 유아교육과정의 실질적 효과와 비례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고, 교사 역시 “자율적인 실험과 반복적 운동을 통해 그 차이를 깨닫고 탈영토화”(Olsson, 2009)하는 ‘주체-되기’의 과정에 있는 존재임을 인정한다면, 위의 문제제기들은 ‘교사들의 인식 변화와 실천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어떠한 방안도 실질적인 방안이 될 수 없다’라는 답을 얻게 될 것이다.
유아중심, 놀이중심 교육과정에서도 교사의 역량을 넘어서는 교육적 실천이 있을 수 없다. 그 실천의 방향은 오로지 교사의 역량에 의해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무엇보다 정책적, 경제적, 환경적 측면에서의 교사교육을 위한 지원이 무엇보다 선결되어야 할 과제가 되어야 하며, 이에 관한 다양한 논의들이 제기 되어야 할 필요성을 제언하고자 한다.
Acknowledgments
이 논문은 2018학년도 부산대학교 박사후연수과정 지원사업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This study was financially supported by the『2018 Post-Doc. Development Program』of Pusan National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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