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대 윤리사상 인과 중용에 대한 연구
Abstract
This paper aims to examine the Rén and Zhōngyōng of Chinese ancient ethical thought and to improve the data that can be applied to us at present. From Qin Han dynasty to the Ming Qing dynasty, Confucian ethical thought became the family ethics, social ethics and national ethics of the general Chinese, and further influenced the Chinese life and cosmos. The intense debates of Confucianism, Mukga, Taoism, and law in the Age of Spring and Autumn and Waring States became the basis for the development of Chinese ethical ideas. Since Confucianism ethics has been in a leading position for over 2,000 years in China, morality has become the basis for almost all cultures and politics, economy, and society. The ethics of ‘Xiào’ and ‘Zhōng’ in China played an important role in establishing and maintaining the order of human relations. This is characterized by the use of the ruling method of the righteous through the integration of morality and politics in the ruling method of the righteous. Therefore, it will be important to understand the basic characteristics of Chinese ancient ethical thought and to understand the traditional ethical thought.
Keywords:
Confucianism, Mohists, Taoism, Fajia, ethical thought, Rén, ZhōngyōngⅠ. 서 론
중국의 전통윤리사상은 고대 사회의 가족중심 구조에서 형성된 것이다. 중국의 고대사회는 가정이 형성되어 가부장제가 이루어지고, 씨족사회가 이루어져 계급질서가 생겨나며, 그 계급질서를 공고히 하기 위한 방편으로 군주의 통치행위가 필연적으로 생겨났다. 이러한 과정에서 계급질서 유지의 수단으로 전통윤리사상이 싹트게 된다.
씨족사회에서 국가로 발전함으로 인해 혈연을 중심으로 한 종법제도가 인간관계의 기본 형식이 되었다. 가족을 중심으로 형성된 개념이 국가라는 개념으로 확대된 것이 종법제도이다. 따라서 종법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인간관계를 안정되게 하고, 사회의 계급질서를 공고히 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또한 자연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가정과 사회의 구조는 가부장제와 종법제도를 불러왔다. 이는 군주의 통치행위를 공고히 하고 정당화 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가정 중심의 중국 전통 윤리사상은 도덕원칙, 도덕가치, 행위규범과 도덕작용의 사상과 특징을 낳았다. 이러한 사상은 끊임없이 발전하여 유가윤리를 이루는 주체가 되었다. 나아가 유가윤리의 핵심인 ‘종법제도’를 보호하는 봉건통치사상에 반하는 ‘도가윤리’도 형성되었다. 원시사회부터 20세기 초까지는 전형적인 가부장적 가족문화에 근본적인 변화는 없었다. 가부장적 가족문화는 중국 사회의 각 영역, 즉 경제, 정치, 종교, 윤리, 도덕, 문화, 풍속, 법률, 교육 등에 계급질서의 요소를 불어넣는 영향을 주었다. 중국인들은 평생을 가족문화라는 근간을 바탕으로 감정, 사상, 도덕행위 등 생활 전반에 걸쳐 영향을 받았다. 중국 사회는 부자관계를 주축으로 한 가족문화를 기본으로 삼는다. 이러한 관습에 따라 생활의 책임과 의무의 형태가 정해졌다.
중국 사회는 문화혁명이라는 혼란을 거치면서 사회・경제형태, 국가정권형식에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혈연을 중심으로 가족문화를 유지했기 때문에 종법체제를 기반으로 하는 국가체제도 유지할 수 있었다. 역사이래로 수차례의 위기가 있었지만 결코 가족문화는 사라지지는 않았다. 양계초(1873~1929)는 “중국 문화는 모두 가족 관념에서 나온 것으로, 먼저 가족의 관념이 있고나서야 인도(人道)의 관념이 있을 수 있으며 그 이외의 윤리 관념도 있는 것이다.”… “효제(孝悌)의 마음이 바로 인도의 핵심이며, 이것을 널리 확장시켜 만물에게까지 미칠 수 있는 것이다”고 했다(Liάngqīchōo Yīnbīngshígējí·zhuānjí dì5cè). 유가의 윤리사상 인(仁)과 중용(中庸)이 중국 고대 윤리사상에 있어 주도적인 위치에 놓일 수 있었던 까닭은 가족문화를 중심으로 정치, 사회, 경제, 문화, 국가권력이 발전되고 유지되어 왔기 때문이다.
중국 고대 윤리사상 가운데 인과 중용을 중심으로 한 고대 윤리사상의 기본 특징을 살펴보는 것은 가정윤리의 붕괴 현상과 생활 전반에 걸친 도덕성의 혼탁이라는 현대사회의 병폐를 조금이라도 되돌아보고, 개선하는데 단초를 제공해 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이는 윤리교육을 바로 세우고 방향을 제시하는데 많은 참고가 될 것으로 생각되어 이 연구를 진행하고자 한다. 연구 방법은 고대의 중국문헌을 통해서 그 내용과 특징을 찾아보고, 현대에 알맞은 요소를 찾아 적용하는 방법을 탐색해 보도록 하겠다.
중국 고대 윤리사상 가운데 인과 중용의 주요 내용과 특징, 사상가를 살펴서 중국고대 사상 인과 중용의 현대적 가치를 발견하고 적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연구를 진행하기로 하겠다.
Ⅱ. 본 론
중국 고대 윤리사상 가운데 가족중심의 유가사상의 핵심인 인과 중용의 기본 특징을 살펴보겠다. 먼저 천인합덕(天人合德)이라는 우주윤리양식에 근거하여 ‘인도(人道)’를 이끌어 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의 고대사상가들은 대부분 천과 인의 상통하는 부분을 찾으려고 했고, 중용을 통해서 천인의 조화, 화해, 일치를 추구했음을 알 수 있다. ‘인(仁)’을 도덕이상으로 삼은 인간세상에서 중용, 평형(공정)은 사람됨의 도덕준칙이 되었다.
그러나 윤리사상과 정치의 일원화는 내용상의 일치와 융화의 정도이지만 정치와 도덕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서로 다른 점이 있다. 정치는 각 계급간의 이해관계를 조절하는 일종의 강제적 수단이고 윤리사상은 교육을 통해 설득하고 감화시키고 사회여론을 압박하는 방법으로 사람간의 상호 이해관계 문제를 조절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윤리사상과 정치의 일치성과 상호 필요성을 연구를 통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1. 천도로부터 인도가 형성
중국 고대 윤리사상의 기본 특징인 ‘천인합일(天人合一)’과 ‘천인합덕’이라는 우주윤리양식에 근거하여 ‘인도’를 이끌어 냈다.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 이르고, 성의 따름을 도(道)라 이르고, 도를 닦는 것을 교라 이른다”고 했다(ZhōngYōng). 맹자는 “그 마음을 다하는 자는 성을 알 것이니 그 성을 알면 곧 천을 알 것이다”고 했으며, 동중서(B.C.179~B.C.104)는 “도의 후덕함은 천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천인합일’과 ‘천인합덕’의 관념은 모두 중국 고대에 있어 인생철학의 이론적 초석을 마련했다. ‘인도’는 인간 행위의 법칙이 되고, 사람이 천명을 위배해서는 안 된다는 ‘천리’가 되었으며, “부자, 군신은 천하에 정해진 것으로 천지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고 했다(Tīngshiwèishū juàn5). 천인의 관계는 실제로 사회와 개인의 관계이다. “인생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하여 위로는 우주 근원에 대해 궁구하여 인생이 시작된 근원에 대해 설명하고 인생수양의 마땅함과 귀숙(歸宿)을 결정하는 것이다”고 하였다(Xiόngshílì, Míngxīnpiān).
‘천인합일’ 관념의 출현은 농업사회의 생산 활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종백화(1897~1986)는 “중국인에게 우주라는 개념은 본래 집과 관련이 있다. 중국 고대에 농민의 집은 바로 그들의 우주였다. 그들은 집에서 공간개념을 알았다. ‘해가 뜨면 집밖으로 나가 일을 하고, 해가 지면 들어와 쉬는 곳’으로 우는 나가고 들어오는 곳이며 여기에서 시간의 개념, 즉 공간과 시간인 주와 합쳐져 그의 생활을 편안하게 하였다”고 했다(Zōngbáihuà, Měixuésǎnbù). 농업생산은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고 이를 지켜야 원활하다. 그밖에 가족사회에서의 인간관계 역시 혈연으로 맺어진 부자관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자연적 관계로 이것의 가치는 바로 ‘조화’와 ‘평등’, ‘편안함’과 같은 것이다.
진숭첩의 연구에 의하면, ‘천인합일’의 개념은 네 가지 의미를 포함한다. 첫째, 천인일도, 둘째, 사람이 만물의 영혼이라는 것, 셋째, 사람의 마음은 천지의 마음과 통한다는 것, 넷째, 하늘과 사람이 일체한다는 것이다. Zhāngdàinián(1909~)은 천인합일의 의미가 다음의 명제를 포함한다고 보았다. 첫째, 인간은 자연의 일부분이라는 것, 둘째, 자연계에는 보편적인 규칙이 있어 사람도 이러한 보편규칙에 순종해야 된다는 것, 셋째, 인성은 바로 천도로 도덕원칙과 자연규칙은 일치한다는 것, 넷째, 인생의 이상은 천인의 조화라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네 가지 명제 중에서 첫째와 둘째 명제는 기본적으로 명확하고, 셋째 명제는 잘못된 것이 있고, 넷째 명제는 가치가 있는 중요한 사상이라고 하였다.(Zhāngdàinián ZhōngguόzhéxuéZhōng)
중국 고대사상가의 관점에서 볼 때, ‘천인합일’은 도덕수양으로 도달해야 하는 최고의 경지이다. 맹자는 인과 천은 서로 통한다고 보고, 인의 선성(善性)은 천부적이라고 생각하여 자신의 선성이 바로 천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진심(盡心), 양성(養性) 등의 과정을 통해 천지와 더불어 위아래가 흐름을 같이 한다고 하였다. “오직 천하에 지극히 성실한 분이어야 그 성을 다할 수 있으니, 그 성을 다하면 사람의 성을 다할 것이요, 사람의 성을 다하면 물건의 성을 다할 것이며, 물건의 성을 다하면 천지의 화육(化育)을 도울 것이요, 천지의 화육을 도우면 천지와 더불어 참여하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ZhōngYōng). 이것은 유가가 이해한 ‘자유’이다. 즉 개인의 성정욕을 배척하고 ‘천리’를 진심으로 실천하여 구한 ‘깨우침’이다. 도가의 대표인물인 장자는 천과 인은 본래 하나였다고 생각하여 “천지가 나와 함께 살아 있고 만물도 나와 함께 하나가 된다.”고 하였다(Zhuangzu·Jìwùlún). 사람들의 주관적인 구별로 천과 인의 통일을 분리한 것이다. 그는 “성인이란 애초부터 하늘도 없고 사람도 없으며 처음도 없고 사물도 없어 일체 무의식이라고 생각한다. 세상과 함께 움직여 가면서도 스스로를 없애지 않는다.”고 하였다(Zhuangzu·Zéyάng). 자연에 순응하여 모든 차별을 없애는 것은 천인혼일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으로 중국의 고대사상가들은 대부분 천과 인의 상통하는 부분을 찾으려고 했고, 천인의 조화, 화해, 일치를 추구했음을 알 수 있다.
2. 존현유등(尊賢有等)
존현유등은 중국 전통윤리 사상에서 제창한 도덕규범, 도덕요구의 기본적인 특징이다. 윤리도덕은 생산관계에 있는 계급, 집단, 개인 관계의 준칙과 규범을 정하고 조정한다. 계급사회에서 윤리도덕의 준칙과 규범에는 명확한 계급성이 있다. 이것은 통치자에게는 ‘수기(修己)’, ‘정기(正己)’를 요구하고, 피통치자에게는 안분과 순종을 요구한다. 이러한 특징은 중국 고대사회에서 개인은 사회질서를 유지하는데 반드시 복종해야 한다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가는 ‘애인(愛人)’을 주장하고, 더불어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는’ 충서(忠恕)의 도는 ‘인도’를 실행하는 원칙의 기본 방법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애인’은 ‘군군, 신신, 부부, 자자’의 예의 척도에 필요한 것으로 ‘예가 아닌 것을 보지도 말고, 예가 아닌 것은 듣지도 말며, 예가 아닌 것은 말하지도 말고, 예가 아닌 것은 행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송 이후 ‘충, 효, 절’이라는 삼대 덕목으로 더욱 명확해졌으며, 인정을 베풀고 인륜을 밝히는 것으로 통일되어 충과 효는 윤리사상체계의 기본이 되었다.
종법제도는 은・주에서 시작되어 역대의 유가 학파들이 선양한 효를 통해 중국 고대윤리사상에서 기본적인 도덕규범이 되었다. 중국의 고대윤리관 중 효는 백가지 선 중에서도 최고의 선에 해당한다. “무릇 효란 덕의 근본이요 가름침은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고 했다(Xiàojīng). 부모가 길러준 것에 대한 경의와 애심은 교육의 출발점이며, 이는 가정을 기본단위로 한 종법제도의 요구를 실현한 것으로 사회와 국가에까지 확대되었다. “이른바 천하를 태평하게 하는 것이 그 나라를 다스림에 있다고 하는 것은 윗사람이 늙은이를 늙은이로 대접하면 백성이 효도하는 기풍이 일어나고, 윗사람이 어른을 어른으로 대접하면 백성이 공손해 하는 기풍이 일어나며, 윗사람이 고아를 구제하면 백성이 배반하지 않으니 군자는 이것을 척도로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고 하였다(Dàxué). 효제를 사회윤리와 국가윤리의 근본으로 삼은 것이다. 맹자는 “천하의 근본은 나라에 있고, 나라의 근본은 집에 있고 집의 근본은 몸에 있다”고 했다(Mencius Lílóushang). 그래서 ‘수, 제, 치, 평’을 유가의 행위규범으로 삼았다.
선진유가는 ‘효’를 윤리 관념에서 처음으로 논의하였다. 유자가 말하였다. “그 사람됨이 효성스럽고 공순하면서도 혼란을 일으키기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군자는 근본에 힘써야 하는 것이니, 근본이 서야만 올바른 길이 생긴다. 효성과 공순함이란 인을 이룩하는 근본이다”고 하였다.(Lúnyǔ Xuéér) 이 말은 비록 유자가 말한 것이지만 ‘효제’에 대한 공자(B.C.551~B.C.479)의 생각을 나타낸 것이다. 공자는 ‘잘 봉양하고’, ‘거역하지 않으며’, ‘공경함이 있는’ 세 가지 품덕을 합쳐 ‘효’라고 칭했으며, 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빠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맹자(B.C.372~B.C.289)는 효의 배양을 인성교육의 기초로 중시하였다. 그는 효제를 인간 천성의 성정으로 간주하고, 효제를 양지(良知), 양능(良能)으로 보았다. 그는 “어린 아이가 그 어버이를 사랑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없으며, 자라서는 그 형을 공경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Mencius Jìnxīnshang). 이러한 애친경장의 행위는 덕으로 다스리는 정치의 전제조건이다. 그래서 효제의 확충이 인의인 것이다. 또 “나의 어버이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남의 어버이를 존경하며, 나의 어린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남의 어린 아이를 사랑한다면 천하를 손아귀에 쥐고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고 했다(Mencius Liάnghuìwángshang). 이것은 가정윤리를 사회윤리, 국가윤리의 출발점과 기초로 본 것이며, 더불어 가정은 도덕훈련이 시작되는 장소이며 이것을 널리 확대하여 사회의 조화로운 발전을 추구한 것이다.
맹자의 윤리 중 효를 충의 관념으로 해석한 것은 없다. 그는 “임금이 신하 보기를 수족과 같이 하면 신하는 임금을 섬기기에 몸과 마음을 다하고, 임금이 신하 보기를 개와 말같이 하면 신하가 임금 대하기를 길 가는 사람 같이 하고, 임금이 신하 보기를 흙과 쓰레기같이 하면 신하가 임금 보기를 원수와 같이 할 것이다”고 하였다(Mencius Lílóuxià). 충은 상대적이고 조건적임을 강조한 것이다.
전제정치가 공고해짐에 따라 윤리의 중심은 ‘효’에서 ‘충’으로 옮겨지고, ‘충군(忠君)의 가치는 최고의 가치가 되었다. 또한 상대적 윤리관(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은 절대적 윤리관(군위신강, 부위자강, 부위부강)이 되었다(ZhōngYōng). 존현유덕은 중국 전통윤리 사상에서 제창한 도덕규범, 도덕요구의 기본적인 특징이 되었다.
3. 인
중국 고대사상가들은 ‘인’을 도덕이상으로 삼은 인간 세상을 강조하였다. 주요 관심 연구 영역은 대부분 인생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현실문제로 이론과 행위의 일치를 중시하고 사상과 생활을 융합시켜 이상적인 현실이란 현실 생활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상생활에서 진리를 추구하려고 노력했다.
‘인’은 도덕규범으로 공자 이전에도 이것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인을 사람됨의 최고 준칙으로 여기고 사람과의 관계를 조절하는 가치기준으로 확대하여 체계적인 인학체계를 구성한 것은 공자이다. 공자는 인을 “인한 사람은 자기가 서려고 하지만 남부터 서게 하고, 자기가 뜻을 이루고자 하면 남부터 뜻을 이루게 한다. 가까이 자기에게서 이루어 남까지 이루게 하는 것이 바로 인의 방도라 할 수 있다”고 하였다(Lúnyǔ Yōngyě). 충서의 도는 도덕생활의 시작과 종결로 충서를 행하는 것은 바로 인을 행하는 것이고, 인을 행하는 것은 사회의 책임과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다. 그는 개인에서 가족, 국가, 나아가 천하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 것에서 보편적인 것까지 인학 발전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맹자의 인정(仁政), 순자(B.C.298~B.C.238)의 진윤(盡倫), 『대학』에서 말하는 수, 제, 치, 평의 도는 모두 공자의 인학사상을 발전시킨 것이다(Dàxué).
공자의 인학사상은 후기 유학자들에 의해 ‘내성외왕(內聖外王)의 도’로 집약되고 내재적 도덕수양과 외재적 정치업적이 모두 진, 선, 미의 경지에 도달할 것을 추구하였다. 비효통(1910~2005)은 “유가학자들이 가장 깊이 연구한 것은 인륜이다. 여기서 윤(倫)은 무엇인가? 내 생각은 밖으로 나가 사회와 관계를 맺으면서 사람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출렁이는 물결과 같다”고 했다. “공자가 가장 중시한 것은 물결이 이는 파장을 널리 파급시키는 것이다. 그는 먼저 한 개인을 인정하고, 그 개인의 영향이 타인에게 미치도록 하며, 자신을 예로 극복하는 것이 바로 수신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동심원의 윤리강상에 따라 인륜이 밖으로 파급될 수 있는 것이다”고 했다(FèiXiàotōng, Xiāngtùshèhuì). ‘자신’은 외계와 단절된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 복잡한 인간관계에서의 중심점이다. ‘자신’의 인격완성은 타인의 인격완성에 영향을 미치며, 자신의 인격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동시에 타인의 인격도 완성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증자(B.C.506~B.C.436)는 “사(士)는 강하지 않을 수 없다. 임무는 무겁고 길은 멀기 때문이다. 인을 자신의 임무로 삼으니 어찌 무겁지 않겠는가? 죽은 다음에야 그만둘 수 있으니 어찌 멀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Céngzǐ). Zhāngzài(1020~1077)는 “천지를 위한 마음을 바로 세우고, 백성은 생명을 보존하고 위로 성왕의 가르침을 끊임없이 받는다면 세상은 태평해질 것이다”고 했다(Zhāngzài). 또 유가에서 ‘신심성명지학(身心性命之學)’은 효제를 기초로 함을 밝힌 것이라고 했다. 나아가 ‘자신을 세우고’, ‘타인에게까지 미쳐’, ‘항상 평안하고 벗을 신으로 사귀면 자신을 해치는 일이 줄어들 것이며’ 널리 백성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또한 국가의 흥망에 대한 민족기개, 백성들이 환난과 생명을 보호하고 고통을 덜어주는 애민사상의 형성에 긍정적인 작용을 하여 중화민족의 성격을 형성하게 하고 민족의 응집력을 높였다. 이는 인을 도덕이상으로 삼은 인간 세상을 강조한 것이다.
4. 중용
형평(공정)은 사람됨의 도덕준칙이다. 중용에서는 유가 최초로 윤리범주를 제시하였다. 중이란 중정, 중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것을 의미하며, 용은 평상, 상도 등을 의미한다.
공자는 “중용의 덕은 지극한 것이다”고 하고 중용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았다(Lúnyǔ Yōngyě). 그는 또 “공정하게 행동하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없을 바에야 차라리 과격한 사람이나 고집쟁이를 택하겠다고 했는데, 과격한 사람은 진취적이고 고집쟁이는 잘못된 일을 하지 않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고 했다(Lúnyǔ zǐlù). ‘중용’의 관념은 공자의 교육실천 중 가치 있는 준칙 또는 방법론의 준칙으로 자주 활용된다.
“자공이 물었다. ‘사(師)와 상(商) 중 누가 더 현명합니까?’ 공자가 말했다. ‘사는 지나치고 상은 모자란다’, ‘그러면 사가 낫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지나치는 것은 모자라는 것이나 같다’”고 하였다. 여기서 ‘지나침’, ‘모자람’은 모두 중용의 원칙에 맞지 않는 것이다. 중도에 적합한 것만이 공자가 숭상하는 미덕인 것이다(Lúnyǔ Xiānjìn). 또 “자로가 ‘들은 것은 곧 그것을 행하여야 합니까?’ 하고 묻자, 공자는 ‘부형이 계시는데 어떻게 들은 것을 바로 행하느냐?’고 말했다. 염유가 ‘들은 것은 곧 그것을 행하여야 합니까?’ 하고 묻자, 공자는 ‘들었으면 바로 그것을 행하여야지!’ 하고 말했다. 공서화가 물었다. ‘염유가 들은 것은 곧 그것을 행하여야 합니까? 하고 여쭈었을 때에는 부형이 계시다고 말씀하시고, 자로가 들은 것은 곧 그것을 행하여야 합니까? 하고 여쭈었을 때에는 들었으면 바로 그것을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어리둥절하여, 감히 까닭을 여쭙고자 합니다.’ 공자가 말했다. ‘자로는 소극적이기 때문에 그를 나아가도록 해준 것이고, 염유는 남을 이기려 하기 때문에 그를 물러서도록 해 준 것이다.’고 하였다”고 했다. 이것도 중용의 원칙을 가치기준으로 삼아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의 성격을 중도에 맞도록 교화시킨 사례이다(Lúnyǔ Xiānjìn).
Zhūxī(1130~1200)는 “자장(子張)은 재주가 높고 뜻이 넓었으나 어려운 일을 하기 좋아했으므로 항상 미치지 못하였다”, “도는 중용을 지극함으로 삼으니 현자와 지자의 지나침이 비록 우자와 불소한 자의 미치지 못함보다 나을 것 같으나 그 중도를 잃음은 똑같은 것이다”고 했다(Lúnyǔ jízhù).
맹자는 ‘중권(中權)’의 개념을 제시하였다. 그는“양자(楊子)는 나를 위하는 것을 취하니 터럭 한 개를 뽑아서 천하를 이롭게 하는 것이라도 하지 않았다. 자막(子莫)은 그 중간을 취하니, 중간을 취하는 것이 도에 가까우나 중간을 취하여 권도가 없음이 오히려 중도에 가깝다는 것이다”고 했다(Mencius Jìnxīnshang). 중용의 도를 지켜서 권력을 행하고 원칙성이 있으면서 융통성이 있어야 중용의 도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중용과 통하지 않는다.
Sīmǎguāng(1019~1086)은 정치를 하는데 있어 ‘중화’를 준칙으로 하는 사상을 설명하였다. 그는 “예가 지나치면 멀어지고 악이 지나치면 방탕하다. 포상이 지나치면 사람들이 교만해지고 형벌이 남용되면 이를 업신여긴다. 너무 강하면 폭력이 되고 너무 부드러우면 나약해진다. 너무 느리면 얽매이게 되고, 너무 급하면 경솔해진다. 이것을 잘 다스리면 불변하는 것이다.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은 그 넉넉함을 덜어주고 부족한 것을 보완하며 너무 과도하면 억제하고 미치지 못하면 이를 일으켜 모두 중화에 이르게 할 뿐이다”고 했다(Tīngshiwèishū juàn). 이상에서 제시한 사상가의 말은 주로 사람들이 도덕수양과 사물을 대할 때, 자신이 언행에 있어 중도를 지키도록 하고 극단을 버리고 백성에게 그 중간을 취하도록 하여 극단에 치우치지 않도록 한 것이다. 그래서 대립되는 것이 통일되도록 했는데, 이는 중용사상에 있어 중요한 것이다. 그밖에 변화 중에서도 중화를 추구하는 것 역시 중용사상에서 중요한 것이다.
유가가 제창한 중용의 정신과 『역전』에서 말하는 음양 대치 변화의 이치는 상통하는 것이면서 모순을 내포하기도 한다. 모순은 서로 마찰되어 추구하는 바가 다르면서 서로 취할 것은 취하고, 끊임없이 변화가 있는 것 같지만 변화는 다시 통일을 일으키고 그러한 통일 중에 대립을 야기 시킨다. 너그러움과 엄격함, 긴장과 이완, 격렬함과 안일함, 급함과 느슨함, 여유와 부족, 이익과 손해, 지나침과 모자람 등은 모두 상대적인 것이다. 이러한 상대적인 것에도 반드시 변화가 있고, 변화에도 반드시 통일됨이 있다. 이러한 상대성, 변화와 통일의 도가 유가에서 말하는 ‘중용’이다. 정이(1033~1107), 정호(1032~1085)는 “천지의 변화는 비록 무궁하지만 음양의 법도, 일월, 한서, 주야의 변화는 영속성이 없는 것이 없다. 이러한 까닭에 이 도를 중용이라고 부른다”고 했다(Tīngshiwèishū juàn). 따라서 유자들은 특히 때에 맞게 절제하여 중용을 지키는 것, ‘상대성’, ‘변화의 과정에서 통일의 도를 추구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맹자가 “벼슬을 할 수 있으면 벼슬을 하고 그쳐야 하면 그치고, 오래해야 할 때는 오래 있고, 빨리해야 할 때는 빨리 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성인은 때를 잘 알아서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Mencius gōngsùnzhùshang). “군자가 중용을 지키는 것은 때를 잘 알아 알맞게 하기 때문이다”고 했다(ZhōngYōng). 모든 것은 시간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러나 균형이 파괴될 때, 기울어진 힘의 시세와 형세를 잘 살피고 시의적절한 임기응변의 조치를 취하면 변화도 시세와 적합하게 되어 중도로 돌아오게 된다. 주희는 ‘때에 맞게’라는 말에서“중이라는 것은 일정한 체가 없으나 때에 따라 있으니 이것이 일상의 이치이다”고 했다(Zhōng Yōngzhānggōu). ‘중’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시’라는 것은 언제인가? ‘시’라는 것은 무엇인가? ‘중’이라는 것과 ‘시중의 도’는 주역과 중용 철학의 정수이다. ‘중’이란 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요, 화(和)란 것은 천하의 공통된 도이다. 중과 화를 지극히 하면 천지가 제자리를 편안히 하고 만물이 잘 성장할 것이다”, “만물이 함께 길러져 서로 해치지 않으며 도가 함께 행하여 서로 위배되지 않는다. 작은 덕은 미미하지만, 큰 덕은 세상은 조화롭게 함이니, 이는 천지를 위대하게 만드는 것이다”고 했다(Zhōng Yōng). 사람들에게 인간과 자연, 개체와 사회, 감정과 이성, 정신과 물질의 조화로운 통일을 추구하도록 한 것이다.
대립적인 면을 어떻게 서로 조화롭게 하고 연결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에서 심오한 사상이 담겨있는 ‘중용’사상은 정반합의 변증법을 운용하도록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것이다. 그러나 중용사상은 조화와 평형의 작용을 과장하고, 상호 의존적인 면을 과대하게 강조하나 발전적인 부분은 적게 말했다. 이는 윤리사상과 행위의 조화에 너무 많은 비중을 두어 긍정적인 요소를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기간의 봉건전제정권 사회에서 중용사상이 그 특색을 유지하고 관심을 받으며 전통윤리에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이것은 안정된 통치기반을 유지하는데 공정한 도덕준칙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5. 의(義)를 중시하고 이(利)를 경시
도덕행위와 공리에 관한 관계는 중국 고대 윤리사상에서 야기되는 기본 문제 중 하나이다. 중국의 고대 윤리사상의 발전을 살펴보면 ‘의를 중시하고 이를 경시하는’ 사상이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다. 서주말기에서 춘추시기의 일부 정치가들은 노예제도와 귀족정권의 독점에 대한 폐단을 보고 ‘의’로 ‘이’를 제한하였다. “일반적으로 의욕이 발동하면 누구나 경쟁적으로 이익을 추구하나 억지로 구해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익추구를 자제하고 도의를 실천하는 것이 다른 사람을 이기는 것이다.”고 했다(Zuǒzhuàn zhāogōng).
공자가 최초로 의와 이를 도덕범주로 제시하여 토론하고, 의를 중시하고 이를 경시하는 것이 유가들이 반드시 취해야 할 가치 있는 선택이며, 사람의 도덕적 자각심을 계발하고 배양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공자는 “군자는 의에 밝고 소인은 이에 밝다.”고 했으며(Lúnyǔ Lǐrén), “군자에게 필요한 것은 의를 실천하는 것이다.”고 했다(Lúnyǔ Wēizi). 또 “군자는 의로 바탕을 삼고, 예로써 실천하며, 겸손하게 말하고 신의로써 이룩한다(Lúnyǔ Wèilínggōng),” “군자는 의를 최상으로 여긴다.”고 하여 공리를 제창하고 사리를 반대하였다(Lúnyǔ Yánghuò). 따라서 “의롭지 않으면서 부귀해지는 것은 뜬구름과 같다.”고 했다(Lúnyǔ Shùér). 공자는 결코 대중의 이익을 간과하지 않았다. 그는 ‘부유하게 하는 것’, ‘가르치는 것’을 치국 방책으로 강조하고 대중의 물질적 이익을 높이고, 문화소질을 높이는 것에 관심을 기울였다. “백성이 이롭다고 여기는 것을 근거로 하여 그들을 이끌어 준다.”고 한 것은 공자가 이의 합리성을 인정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Lúnyǔ Yáoyuē). 그러나 공자는 “부와 귀라는 것은 사람들이 탐내는 것이지만 정도로서 얻은 것이 아니라면 누리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Lúnyǔ Lǐrén). 도의와 부귀, 의와 이가 충돌하는 순간 공자는 도의를 가치선택의 준거로 삼을 것을 주장하였다. 즉 생활이 빈곤할지라도 사람됨의 원칙을 절대 포기하지 말고, 자신의 사리를 챙기는 마음에 굴복해서는 더욱 안 되며 대중 혹은 멀리 내다볼 수 있는 이익을 위해 희생할 것을 주장하였다.
맹자는 의와 이의 분별을 국가흥망과 관련시켜 생각했다. 그는 재부와 권력을 탐욕스럽게 쟁탈하는 것은 천하를 크게 혼란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맹자는 양혜왕에게 “왕께서는 어찌 꼭 이익만을 말씀하십니까? 단지 인과 의가 있을 뿐입니다. 왕께서 ‘어떻게 하면 내 나라를 이롭게 할까?’ 하신다면, 대부들은 ‘어떻게 하면 내 고장을 이롭게 할까?’ 하며, 선비와 서민들은 ‘어떻게 하면 내 자신을 이롭게 할 수 있을까?’ 하여 위아래에서 서로 이익추구를 하게 되면 나라는 위태로울 것이다.”고 훈계하였다(Mencius Liάnghuìwángshang). 만약 제후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신의 사리를 위해 서로 싸운다면 천하의 사람들은 모두 이익만을 추구하려고 할 것이며, 그 결과 천하에 대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맹자는 공자가 ‘의를 최상으로 하는’ 관점을 견지하고 나아가 “목숨을 버려서라도 의를 취해야 한다”고 제시하였다. 그는 “목숨 역시 내가 원하는 것이요, 의 역시 내가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둘 다 가질 수 없다면 목숨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고 했다(Mencius Gàozīshang). 생명은 중요하긴 하지만 인격의 독립과 존엄이 더 중요한 것으로 생명을 버려서라도 인격의 존엄과 독립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순자는 춘추전국시대 의리사상의 집대성자로 “먼저 의를 생각하고 후에 이를 생각하라”는 명제를 제시하였다. 그는 의는 인생가치의 본질적인 특징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물과 불에는 기는 있지만 생명이 없고, 초목에는 생명은 있지만 지각이 없고, 금수는 지각은 있으나 모든 행위의 규범이 되는 예의가 없다. 오직 인간에게만 기도 있고 생명도 있으며 지각도 있고 더불어 예의도 있다. 그러므로 천하에서 인간이 가장 귀한 것이다.”고 했다(Xunzi Wάngzhì). 이는 인간 삶의 가장 고귀한 가치이다. 따라서 한 인간이 스스로 의를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 실천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인격이 건전하게 성장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의를 먼저하고 이를 뒤에 하는 사람은 명예를 얻게 되고, 반대로 이를 먼저하고 의를 뒤로 돌리는 사람은 치욕을 얻게 된다.”고 했다(Xunzi Rόngrǔ). 또 “학문은 하지 않고 정의도 없으며 부와 이를 높이는 자는 속된 자”라고 했다(Xunzi Rúxiào). 그는 “의를 먼저 생각하는 자는 부유하거나 지위 높은 사람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고, 도의가 중후해지면 임금이나 장관도 가볍게 보게 된다. 내적인 도의는 가치를 지니지만 물질이란 경미한 것들이기 때문이다.”고 했다(Xunzi Xiūshēn). 순자는 의리의 관계를 국가의 흥망성쇠와 관련지었다. 그는 “의를 좋아하는 마음과 이익을 좋아하는 마음, 이 두 가지는 사람마다 한꺼번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요·순과 같은 성인이라도 백성들이 이를 추구하는 마음을 아주 가볍게 여길 수는 없다. 그러나 요·순 두 성왕은 의를 좋아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를 추구하는 마음으로 하여금 의를 좋아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 하나라의 걸왕이나 은나라의 주왕과 같은 폭군이라도 백성들이 의를 좋아하는 마음을 아주 없애버릴 수는 없다. 그러나 걸·주 두 폭군은 이를 좋아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의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하여금 이를 추구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의가 이를 극복하는 세상이 잘 다스려진 세상이요, 반대로 이가 의를 이기는 세상은 어지러운 세상이다.”고 했다(Xunzi Dàlüè). 순자는 도의를 숭상했지만 이를 배척하지 않았다. 민중의 이익, 사회의 이익을 의의 범주에 넣어 의와 이를 모두 고려하였다.
봉건통치의 공고와 강화는 동중서 이후의 사상가들에게 의와 이를 대립하게 했다. 동중서는 “무릇 인이란 의를 바로 잡으려는 것이지 이익을 꾀하는 것이 아니며, 그 도를 밝게 하려는 것이지 그 공을 계산하려는 것이 아니다.”고 했다(Chun Qui Fan Lou). 송대의 소의 (1011-1077)도 “천하가 잘 다스려지면 사람은 반드시 의를 숭상한다. 천하가 혼란해지면 사람은 이를 숭상한다. 의를 숭상하면 세상에 겸손함이 유행하고, 이를 숭상하면 서로 찬탈하는 것이 유행하게 된다.”고 했다(HuangjiJingshi Guānwùnèipiān). 이러한 사상은 통치계급의 지지를 받았는데, 이는 종법제와 군주전제의 통치하에서 개인의 자주적인 정치참여, 경제권리가 없었고, 종족 또는 국가의 이익에 앞서는 것은 더욱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를 중시하고 이를 경시하는’ 도의론 가치관은 도덕적 평가, 이상적인 인격의 형성, 도덕수양의 경지를 직접적으로 결정하여 사회의 가치체계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가치관은 사회발전에 긍정적인 영향과 부정적인 영향을 동시에 끼쳤다. 도덕은 바로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조절하는 규범 또는 규칙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회도덕규범을 준수하는 것은 때로는 개인의 이익을 희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의를 사회의 이익을 대표하는 것으로 간주한다면, ‘의를 중시하고 이를 경시하는 것은’ 품격 있는 행위가 되는 것이라고 의리사상에서는 판단하였다. 역사에서 많은 민족 영웅은 ‘목숨을 버리고 의를 취했는데, 이것은 이러한 가치관과 관계가 있다.
그러나 의를 중시함으로써 물질적인 이익의 장점을 부인하고, 의를 봉건지주계급의 이익을 대표하는 것으로 내세워 많은 사람들이 삶을 개선하려는 갈망을 억압하는 부정적인 결과를 낳기도 했다.
6. 지덕론
공자, 맹자, 순자가 ‘인과 지’를 제시하고, 『중용』에서 ‘덕성을 높이고 학문을 따를 것’을 제시한 후 유가학파들은 기본적으로 도덕과 지식의 통일을 견지하는 경향으로 흘러갔다. ‘덕성을 높이고’ ‘학문을 따르는 것’은 상호 보완하는 것으로 덕성을 높이는 것은 학문을 따르는 것을 전제로 하고, 학문을 따름은 덕성을 높이는 것이 된다. ‘인’은 생명의 본체이고 ‘지’도 생명의 근원으로 자신의 능력을 체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과 지의 통일, 체와 용이 두 개가 아니라는 것은 유가사상에 있어 도덕과 지식의 관계를 논증하는 기본법칙이다. 당대 이후 장재, 이정 등은 ‘견문의 지’와 ‘덕성의 지’의 명제를 제시한 후, 덕과 지의 관계에 대한 유가의 관점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송대의 유학자들은 두 개의 결합을 견지하고 명대의 유학자들은 ‘덕성을 높이는 것’을 주장했으며, 청대에 이르러서는 ‘학문을 따르는 것’을 중시하였다. 종합적으로 보면 주덕론은 계속 주지론을 넘어 중국사상사에서 주류를 차지하였다. 여영시(1930~ )는 “중국인은 가치의 근원이 사람의 마음에 있다고 보기 때문에 자아를 객관화시키는 것이 오랜 전통이 되었다. 멀리 공자, 맹자, 노자, 장자에서 가까이는 송명 이학 모두 자아의 인식과 통제를 주요 목표로 삼았다.”고 했다(Yúyīngshí zōngjiezhíxìtkŏngkānzhōngguόwénhuādexiàndàiyì).
인격교육으로 도덕과 지식교육을 하는 것은 선진유가학파에서부터 시작하여 명·청유가학파에 이르기까지 계승·발전된 전통교육이다. 개인적인 ‘학습의 도’에서 ‘도를 즐기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시 ‘도를 지키는 것’에서 ‘도를 행하는 학문’을 추구하는 것이다. 지식교육은 일종의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은 도덕교육이다.
‘지·인·용’은 천하의 덕에 이르는 것이다. 육경의 가치는 ‘『예』는 사람을 절도 있게 하고, 『악』은 사람의 마음에 조화를 일으켜 주고, 『서』는 사실을 가르치고, 『시』는 감정과 의지를 창달시키고, 『역』은 변화를 가르치고, 『춘추』는 대의를 가르치는 것’이다(Shìjì Tàishìgōngzìxù). 이것은 모두 도덕적 요구를 실현하는 교재다. 경을 읽는 것은 ‘궁리, 수업’을 위한 것이고, ‘도의 전달’을 위한 것이다.
지식을 ‘덕성의 지’와 ‘견문의 지’로 구분하는 것은 ‘덕성의 지’를 근본으로 하고 ‘견문의 지’를 그 종결로 하는 것이다. 덕성의 지는 견문의 지보다 우선하며 지행합일, 체용불이의 강조는 송명유학의 대표인물인 장재, 이정, 주희, 육구연(1139-1193), 왕양명(1368-1661), 황종희(1610-1695), 왕부지(1619-1692) 등이 강조한 것이다. 주희, 왕부지 등이 주지정신이 매우 뚜렷한 사상가라 할지라도 덕성의 지식이 견문의 지식보다 우선한다는 사상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주희는 “덕성을 높인다는 것은 마음을 보존하여 도체의 큼을 다하는 것이고, 학문을 따른다는 것은 지식을 지극히 하여 도체의 세세함을 다하는 것이니 이 두 가지는 덕을 닦고 도를 모으는 큰 단서이다.”라고 해석했다(Zhūxī ZhōngYōng zhānggōu). 유가에서 이른바 말하는 덕성의 지식은 주로 심성함양, 윤리규범, 도덕실천, 인격교육 등에서의 도덕지식을 가리킨다. 견문의 지식은 덕성지식, 생활지식, 책 지식 등과 직접 또는 간접적인 경험지식을 가리킨다.
지를 덕성의 지와 견문의 지 두 가지로 구분하는 것은 장재에서부터 시작하였다. 그는 “마음을 크게 하면 천하의 사물들을 체득하게 된다. 사물을 체득하지 못하면 마음과 사물 사이에 간격이 생기게 된다. 세상 사람들의 마음은 듣고 보는 편협한 데 머무르지만 성인은 본성이 극진하여 보고 듣는 것에 마음을 두지 않아 그가 천하를 볼 때는 어느 물건 하나 자신과 같지 않은 것이 없다. … 덕성으로 아는 것은 보고 듣는 데 기원을 두지 않는다.”고 했다(Zhēngmēng Dàxīn). 이러한 구분 방법은 성인이 감각경험으로 아는 지식의 한계가 아니라 자아를 초월하여 천지만물과 일체하는 것이다. 도덕적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느냐의 여부는 사람들의 본심본성의 각성 여부에 있는 것으로, 송대 유가윤리학의 발전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다.
정이는 “견문의 지는 덕성의 지가 아니다. 물은 물과 교류하는 것으로 앎이라는 것은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른바 오늘날 다재다능하다는 것 역시 그러하다. 덕성의 지는 견문이 아닌 것이 없다.”고 했다(Tīngshiwèishū). 육구연은 “덕성을 높이는 것을 알지 못하면서 어찌 학문의 도를 말할 수 있는가?”라고 했다(Xiàngshānxiānshēng quànjí yǔlùshang). 나아가 왕양명은 ‘지행합일’의 설법에서 ‘도를 묻는 학문’과 ‘덕성을 높이는 것’이 결국 일치한다고 하였다. 그는 양지는 즉 덕성의 지고 덕성의 지는 학문에서도 으뜸이다. 덕성의 지는 사람을 가르치는 첫 번째 의이고 견문의 지는 두 번째 의로 덕성의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종합해보면 덕을 중심으로 한 지덕 통일, 지덕론의 특징은 중국 고대의 인문주의 전통을 형성하고 지식교육과 도덕교육을 결합시켰다. 그러나 지식의 전수와 과학의 발전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7. 도덕과 정치의 일체화
공자는 통치자는 도덕교화로 통치를 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그는 “덕으로써 인도해 주고 예로써 다스려 주면 염치를 알게 되고 또 올바르게 된다.”고 했다(Lúnyǔ Wéizhèng). 그는 정법, 형벌은 사람으로 하여금 감히 범죄를 저지르지 못하게 하고 덕과 예는 사람에게 부끄러움을 알게 한다고 생각했다. 맹자는 통치계급이 천하를 얻는 도는 민심을 사로잡는데 있으며, 민심의 도를 얻기 위해 정치적 수단을 이용하는 것은 도덕교화를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보다 그 효과가 없다고 했다. 맹자는 “좋은 정치는 백성을 두려워하고 착한 가르침은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다. 좋은 정치는 백성들을 편안하게 살게 하고, 착한 가르침은 백성의 마음을 얻는다.”고 했다(Mencius Jìnxīnshang). 또한 그는 “어질면서 그 어버이를 버리는 사람은 없으며, 의로우면서 그 임금을 뒤로하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Mncius Liάnghuìwángshang). 가부장제의 가족에서 형성된 부형에 대한 복종을 군주에게 복종하는 것에까지 확대하고, 가족혈연관계의 온정을 사회와 정치 관계까지 확대해야 통치계급이 정신적 지주로 여기게 할 수 있는 것이다. 한 대에 동중서가 제시한 “백가를 퇴출하고 유술만을 숭상하자”는 건의가 채택된 이후, 삼강, 오상은 주도적인 지위를 지닌 국가도덕이 되고, 이중 삼강은 최고의 도덕준칙이 되었으며, 최고의 정치원칙이 되었다. 효, 충, 절 등은 법제화되었다. 도덕과 정치 일체화로 계급사회에서 도덕은 계급성을 반영했으며, 어떤 도덕범주는 계급의 정치를 위해 있었는데, 봉건도덕이라는 것은 봉건지주계급의 이익과 일치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될 것은 이른바 도덕과 정치가 중국의 고대사회에서 일체화되어 나타나는 점이다. 도덕과 정치에서 말하는 것은 내용상의 일치와 융화의 정도로 정치와 도덕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서로 다른 점이 있다. 정치는 각 계급간의 이해관계를 조절하는 일종의 강제적 수단이고, 도덕은 교육을 통해 설득하고 감화시키고 사회여론을 인도 하는 방법으로 사람간의 상호 이해관계 문제를 조절한다. 이 둘은 서로 일치하면서 상호 필요로 했던 것이다.
Ⅲ. 결 론
춘추전국시대 유가, 묵가, 도가, 법가 등의 치열한 사상 논쟁은 중국 윤리사상이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진한 이후 명 청에 이르기까지 유가의 윤리사상은 점점 중요해지고, 도덕가치의 핵심은 인과 중용의 윤리를 본위로 하는 중국 고대 문화전통이 서서히 형성되었다. 유가의 윤리사상에서 인과 중용은 일반 중국인의 가정윤리관념, 사회윤리관념 및 국가윤리관념이 되었다. 나아가 중국인의 인생관과 우주관에 영향을 주었다. 선진시대의 공맹, 송명시대의 이학을 거쳐 신 유가에 이르기까지 인과 중용 중심의 심성학은 계속 중국 문화의 정수가 되어 도덕가치관을 중심으로 한 인생철학이 되었다. 중국에서 유가윤리가 2000여 년 동안 주도적인 위치에 있음으로 인해 인과 중용은 거의 모든 문화를 이루는 토대가 되었으며 정치, 경제, 교육, 법률, 문학예술 등을 윤리화시켰다. 중국에서 ‘효’, ‘오륜’을 주요내용으로 한 윤리관은 인륜관계의 질서 확립과 유지에 중요한 작용을 했다.
중국 고대사회에서 인간관계의 기본구조인 종법제로 인해서 종법관계를 알고 조절하는 인과 중용은 나라를 안정되게 다스리는 것과 관련되어 도덕과 정치가 일체화 되는 특징이 나타났다. 이는 위정자의 통치방법에 있어서 도덕과 정치의 일체화를 통한 위정자의 통치술로 이용되게 한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중국의 고대 윤리사상 가운데 인과 중용은 중국 고대 문화의 특징을 결정짓고, 전통윤리사상의 방향을 이끌었다. 또한 고대 교육사상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이해하는 데 중요한 지표가 될 것이다. 인과 중용사상은 저출산 시대에 가정에서 형제자매 관계에서 체험하지 못한 협동과 배려심을 학교 교육에 적용하면 민주시민사회의 올바른 구성원으로 자라게 할 것이다. 또한 중국의 가족중심 구조는 우리나라에서 교육열을 촉발시켜 산업화와 민주주의 발전에 많은 역할을 하였다. 인과 중용 중심의 중국 고대 전통윤리 사상은 물질만능의 조류에서 파생된 4차 산업혁명시대에 사람중심 사회로 전환하려는 노력에 필요한 덕목이며 현대의 교육과 정치, 사회 등에 적용하여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요소라고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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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úyīngshí zōngjiezhíxìtkŏngkānzhōngguό wénhuādexiàndàiyìyì, wénhuàwēijīyǔzhǎnwàngxià
- Zhang Zai
- Zhāngdàinián(1985), ZhōngguόzhéxuéZhōng ‘tiān rén hé yī’ sīxiǎngdepōuxī.
- Zhēngmēng Dàxīn
- ZhōngYōngzhānggōu
- Zhuangzu·Jìwùlún
- Zhuangzu·Zéyάng
- Zhūxī ZhōngYōngzhānggō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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