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대 학술의 교육내용 및 시사점 탐색
Abstract
This paper is to study on Research the educational content and implications of ancient Chinese scholarship. In everyday life, social activities, production activities, and scientific activities, people became knowledge by summarizing what people understood about things. Academic performance is included in the content of the curriculum to select and organize curriculum content, and the content and curriculum of the education reflect academic performance and these results are passed on to future generations. In order to understand the contents of ancient Chinese education and the development and change of the curriculum, we must first understand the changes in ancient Chinese academic thoughts. Chinese scholarship has continued through the process of bending, including prosperity and decline. The Chinese embraced and assimilated outpatient scholarship and were also good at change. Chinese scholarship is characterized by originality, continuity, inclusiveness and unity. China's academic origin is very deep in history and rich in literature. Therefore, discussing Chinese ancient scholarship and proving its origin will play an important role in academic and educational development.
Keywords:
The origin of scholarship, Educational contents, Academic testimonyⅠ. 서 론
지식은 인류 인식의 성과이다. 사물의 본질과 체계를 인식하는 측면에서 말하자면, 지식은 크게 생활상식과 과학지식으로 구분된다. 과학지식은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과학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이것은 사람들의 자연, 사회, 인류에 대한 소중한 성과이다. 지식은 역사를 계승시키고 끊임없이 증가하는 등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지식과 교학의 관계에 대해 말하자면 지식은 교육 목적, 양성목표, 피교육자의 연령특징, 교학규율, 학제의 구체적인 상황과 교육사업, 발전수준 등을 토대로 해서 여기에 선택, 수정, 조직과 분배를 한 것이다. 학교 교육은 교육과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지식과 기능이다. 오랫동안 인류는 생활 속에서 풍부한 지식과 기능을 축적했으며, 그 내용은 매우 광범위했다. 교육과정은 지식, 기능과 이에 상응하는 교육을 받는 사람들의 활동에 의해 조직된 것이다. 사람들은 기초지식, 기능, 재능을 선택하여 교육과정을 구성하고 이를 교육활동에 적용시켰다.
일반적으로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지식을 ‘학술’이라고 부른다. 중국 고대 교육을 찾아 분석하기 앞서 그 시기를 명확히 하자면 황제시대부터 한나라를 거쳐 위진남북조 시대까지를 일컫는다. 그러나 교육 내용은 위의 기간을 거쳐 중세와 근·현대까지 그 기조를 유지한다. 중국 고대학교의 교육내용은 기본적으로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학술이었다. 당시의 생활응용지식, 생산노동경험 및 대부분 실용과학기술로 주로 부유한 계층에서 서로 전하거나 사도들이 개인적으로 전수한 것이다. 『사고전서총목(四庫全書總目)』에 기재된 ‘경(經)’, ‘사(史)’, ‘자(子)’, ‘집(集)’은 자연, 사회, 사유영역 등 다양한 분야의 내용이 담겨 있다(Shin, 2011). 그러나 모두 고대의 학교 교육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전통교육에서 말하는 학(學)이라는 것은 주로 부문별로 나눈 것을 추구하는 지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지식을 위한 지식도 아니며 학으로 사람이 되기 위한 것이다. “학이라는 것은 배워 성인이 되는 것이다(Kim, 2008)”, “학술은 인재의 근본이요, 인재는 정사(政事)의 근본이다. 정사라는 것은 백성의 목숨을 지키는 근본이다. 학술이 없으면 인재가 없는 것이고, 인재가 없으면 정사가 없는 것이며, 정사가 없으면 나라를 편안하게 다스릴 수 없고 백성의 목숨도 없는 것과 같다”고 했다(Kim, 2008).
연구 방법은 인재양성을 위해 교육내용이 어떤 과정으로 결정되는지를 탐구하는 것이며 교육의 목표를 달성하는 방법을 연구의 내용으로 한다. 이를 위한 연구 문제는 지식의 분류와 학술사상의 변화를 알아보고, 중국 고대 교육의 주요 내용인 묵가·도가·법가·병가 등의 학술사상이 교육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다. 그리고 외래 학술사상이 중국 고대 교육에 미친 영향 및 사학과 목록학의 기능이 교육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분석한다. 이는 중국 고대 학술의 기원과 변화를 밝혀 교육내용에 끼친 영향을 파악하는 것이다.
학술은 인재의 근본이 되고 인재가 사회의 근간이 되며, 사회의 근간이 문화를 발전시킬 뿐만 아니라 인류의 행복을 추구하는 절대적인 존재가 된다. 따라서 연구의 목적은 중국 고대 학술의 교육내용을 살펴 그것을 분석하고 오늘날 교육의 방향을 모색해 보는 것이다.
Ⅱ. 이론적 배경
1. 지식의 분류와 학술사상의 변화
선진시기의 교육자 공자, 맹자, 순자에서 명・청시기의 교육자 고염무, 왕양명, 황종희, 안원은 모두 수기치인의 실학을 매우 중시했다. 교육목표는 이러한 수기치인의 실학을 실시하는 것으로, 내성외왕의 도를 실현하는 것이다. ‘경’, ‘사’, ‘자’, ‘집’ 네 부분의 학술은 선택, 변화, 조직과 분배를 통해 교육과정이 되었다. 이것은 주로 수기치인, 내성외왕의 범주에 속하는 내용이다. 지식의 내용도 점점 증가하고 그 영역도 끊임없이 확대되어 학교의 교육과정도 사회의 진보와 학술적 성취를 반영하게 되었다.
교학내용도 점점 풍부해져 당・송 이후 실용과학, 예를 들면 수학, 의학, 천문학 등이 교육내용에 포함되고 예술교육도 어느 정도 중시되었다. 한・당 이후의 관학과 사학에서의 교육은 ‘수기치인’의 내용에서 교육의 내용을 선택·조직한 것이다. 특히 송·명시기에 이르러 이학(理學)의 번성으로 ‘심성(心性)의 학’이 당시 학술계의 주목을 받으면서 사서(四書)의 지위는 점점 ‘오경(五經)’의 지위를 초월했다.
많은 학자들이 육예를 배우지 않고 선현들의 고전을 고증하지 않았으며, 당대의 임무를 다하지 않고 부자(夫子)론학을 들어 정치를 논하는 이유를 일체 묻지 않고 일관(一貫)을 말하되, 마음을 밝혀 성(性)을 보는 ‘무언(無言)’으로 수기치인의 실학으로 삼으라고 했다(Kweon, 2008). 학술이 넓은 것에서 간단한 것으로, 복잡한 것에서 단순한 것으로, 외부에서 내부로 전환하는 발전 양상이 나타났다.
학술적 시각에서 주로 정치학, 경제학, 역사학, 윤리학, 교육학, 군사학, 사회학, 종교학, 예술, 문학 등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에 집중되어 있었다. 다만 수기치인과 관련이 있는 것은 자연과학으로, 교육의 내용에 포함된다.
예를 들면 방이지, 왕부지가 말하는 ‘질을 평가하는 학문(質測之學)’이다. 자연과학의 중시는 근·현대학교가 설립된 이후의 일이다. 이러한 상황의 기저에는 양계초가 “‘내성외왕의 도’라는 말은 중국 학술의 전체를 포함하는 것이며 그 취지는 자신을 수양하여 내부에서 만족하는 것에서 외부적으로 사회에 만족하는 것이다”고 한 것에 있다(Kim, 2018). 이러한 인식에 기초하여 양계초(1873-1929)는 또 중국의 학술을 연구하는 방법에 대하여 논하고, ‘문헌적 학문’과 ‘덕성의 학문’을 구분하여 객관적 과학방법과 내성적 궁행의 방법을 채택해서 연구해야 진리를 구할 수 있다고 했다. 중국의 학술과 교육의 관계를 연구하려면 특히 이러한 기본정신과 방법을 이해해야 한다.
중국의 학술은 비록 번성과 쇠퇴의 굴곡을 거쳤지만 끊임없이 지속ㆍ발전되었으며 외래학술을 수용하고 이를 동화시키며 더불어 변화에 있어서도 뛰어났다. 자국의 학술전통을 외부의 것과 융합하여 새로운 문제, 새로운 내용을 발견하고 새로운 학술사조를 형성하여 학술이 보다 높은 경지로 나아가도록 했다.
노신(1881-1936)은 “오늘의 것을 취하고 옛것을 되살리며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Kim, 1999). 진인각(陣寅恪, 1890-1969)은 “외래의 학설을 수용하면서 본래 민족의 본위를 잃어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Chén, 1980). 중국의 학술은 기본적으로 노신과 진인각이 개괄한 통의(通義)를 따르고 이것을 변화ㆍ발전시킨 것이다. 따라서 독창성, 연속성, 포용성, 통일성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역대전(易大傳)』에서 말하는 “천하를 통일시키려면 백번을 고려해야 촉망받는 앞날이 될 수 있다”고 했듯이 수천 년의 학술발전사에서 비록 끊임없이 백가쟁명의 국면이 나타났지만 이러한 과정을 통해 ‘수기치인의 실학’을 중심으로 한 학술체계가 형성된 것이다(Lee, 2018).
Lǚ(1983)는 중국 학술 변화의 대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중국의 학술은 크게 세 번 변했다. 모든 학술사상의 근원은 원시시대 노동을 통해 축적되었다. 동주(東周)시대에 이르러 구류(九流)(전국시대의 유가. 도가, 음양가, 법가, 명가, 묵가, 종횡가, 잡가, 농가)가 나타나고 매우 흥성해졌는데, 이것이 제1기이다. 진한시대의 유가, 도가, 법가의 학문 및 위진시기의 현학은 후대의 어느 시기에도 비교할 수 없을만큼 흥성하였다.
시간이 흐른 후 불교가 점점 일어나고 수·당 시기에 이르러 매우 흥성했는데, 이것은 큰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송·명의 이학은 불교와 중국의 고유사상이 융합된 것이다. 명 중엽 이후 서학이 점점 들어오면서 약 40년 동안 전국을 풍미했는데, 이때 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고대부터 한대까지 중국의 학술은 독립적으로 발전하였다. 하나라, 은나라의 소박함, 서주ㆍ동주의 문 숭상 등은 배움이 관부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이것은 육예를 핵심으로 한 ‘왕궁의 학’을 구성하였다. ‘왕국의 학’은 제자백가를 분산하는 국면을 낳았다.
육예는 중국 고대 학술의 총체로 제자백가의 학술은 상고시대의 육예에서 나온 것이다. 공자는 하, 상, 주나라의 학술을 창조적으로 종합하였다. 그는 육예에 새로운 내용과 정신을 부여하여 사학에서 전수할 교재를 편찬했는데, 최초로 학술과 교육의 결합을 촉진시켰다. 묵자는 최초로 육예를 배웠는데, 후에 도가, 법가, 명가, 음양가 병가 종횡가, 잡가, 농가, 소설가, 의가 등 10가를 비판하는 예악의 비판자가 되었다. 또한 왕궁의 학에 대한 결점을 자세하게 밝히고 각각 그 한계를 극복하여 새롭게 수립하였다.
당시 제자백가는 사회의 병폐를 막고 학문으로 다스린다는 취지로 삼아 새로운 내용을 결합하고 문제를 연구하여 새로운 사조를 형성하고 상호 보완하여 고대 학술이 새롭게 발전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백가쟁명’의 학술 황금시대가 나타났다. 왕궁의 학이 제자백가의 쟁명으로 변하는 과정에서 신(神) 본위의 학술이 인간 본위의 학술로 변화되었으며, 인문주제 즉 내성외왕, 수기치인의 국면이 초보적으로 형성되었다. 이 시기는 중국 고대 학술의 기초가 다져지던 시대이다.
일찍이 전국시기에 순자의 학은 이미 집대성된 학술체계로 한대까지 크게 유행하였다. 법가의 학설은 진시황에 의해 보급되고, 『여씨춘추(呂氏春秋)』는 백가를 종합한 것으로 사상의 통일을 이루었다(Park, 1999). 『회남자』는 도가를 중심으로 백가를 통솔하여 학술을 통일하도록 하는 단서가 되었다(Lee, 2011). 동중서는 ‘춘추대일통’의 이치를 인용하여 유학을 흥성하게 하고 숭상할 것을 주장하였다(Dǒng et al., 2005).
한대는 경학으로 나라를 다스려 경학이 학술의 중심이 되면서 유학이 문화의 주류가 되었다. 한무제는 오경박사를 설치하고 오경 외에 『효경』과 『논어』를 합쳐 ‘칠경’이라고 했다. 당시 유학의 숭상은 학술과 교학이 결합되도록 하였다. 오경박사의 설립 후 ‘경학시대’가 열렸다. 서한시대에는 금문경학이 통행했는데, 『공양(公羊)』학은 치국의 법전으로 간주되었다. 금문경학은 음양오행, 참위설과 서로 결합되어 발전이 없었으며, 고문경학은 이러한 틈을 타고 일어나 동한대 이르러 크게 성행하여 금문경학을 뒤엎은 형세가 되었다.
금문경학과 고문경학의 장기간의 쟁론은 학술사상의 중대 분기점이 되었다. 정현은 금고문경학에 두루 능통하여 독존적인 위치에 있었는데, 그는 경학을 통일하여 정학(鄭學)을 유행시키고 금문경학이 관학화 되어가는 것을 폐지하여 장기간 진행되었던 한대 경학의 논쟁을 멈추게 하였다. 양한은 경학의 전성시기로 경전은 학교에서 교재가 되어 전수되었으며, 경학대사들도 많은 제자들을 모아 문하에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 경학대사가 가르치는 것에 있어 이른바 ‘사법(師法)’과 ‘가법(家法)’이 있었는데, 학생들은 각각 그 사법을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서한에서는 사법을 중시하고 동한에서는 가법을 중시하였다.
정현은 경에 주를 함에 금고문을 모두 선택해서 사법, 가법을 따르는 것을 타파하였다. 학술과 교학의 관계를 분석해보면, 경학의 성행은 경학과 고대 교학이 필연의 관계가 되도록 하여 경을 반드시 배워야 하는 학풍이 형성되도록 했으며, 경학을 배우는 것은 관리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조건이 되었다. 한·당 이후, 경학은 통치 지위에 올라 경전을 훈고·해석하는 것이 학술의 새로운 양상이 되었는데, 이것은 학술의 자유로운 발전을 속박하였다.
서한시대부터 형성된 경학시대는 동한, 위진남북조, 수, 당, 송, 원, 명, 청에 걸쳐 분열, 통일, 경직, 갱신, 쇠락, 부흥, 다시 쇠락의 과정을 거치면서 5·4 신문화운동이 일어나기까지 과학과 민주사상의 거대한 충격을 받으면서 비로소 끝났다.
위진남북조에서 당초와 당의 전성기까지 경학은 분열과 통일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금고문의 쟁론은 극명해졌고, 정치적 태도도 분명하였다. 서한 말에서 동한 말에 이르기까지 금고문의 논쟁은 무려 200여 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러한 쟁론은 한대 말까지 이어졌으며, 쟁론의 결과로 금문학파가 쇠퇴하였다.
위진 경학은 주로 정학과 황학 간의 시비논쟁으로 경학이 현학화 되었다. 위진 시기는 현학이 성행하고 사들이 노, 장을 숭상하며 청담이 유행하였다. 현묘하고 심원한 『노자』와 『장자』,『역경』에 대해 위진의 이름난 사들은 이들을 ‘삼현(三玄)’이라고 불렀다. 노자, 장자로 유가의 경전을 해석하여 경학이 현학화 되기도 했는데, 왕필(王弼, 226-249)은 『역』에 주를 달고 전통적인 상수(象數)를 버리고 의리를 말하는 『역』학의 최초의 의리파였다. 남북조시대는 정치가 분열되고 남북이 서로 대치하여 전쟁이 끊이지 않았으며 학술은 쇠퇴하였다. 금문경은 거의 소실되고 의미있는 것은 『모시』와 정현이 주를 한 『삼례(三禮)』, 두우(杜佑, 735-812)가 주를 한 『좌전(左傳)』 등 모두 고문경이었다.
경학은 남학과 북학으로 구분된다. 남조의 경학은 위진시대의 분위기를 이어받아 『삼례』와 『역』은 정현이 아닌 왕필을 따랐다. 북조의 경학은 양한의 학풍을 회복하는 경향이었는데, 노장을 배척하고 유가의 도를 숭상하였다. 위진 남북조 시기에는 비록 현학이 왕성했지만 불교, 도가의 사상도 유행하였다. 그러나 나라를 세우고 백성을 다스리는 원칙(建國君民)을 통치의 책략으로 삼아 “나라를 세우고 백성을 다스림을 최우선으로 삼고 몸과 행동을 연마하는데 경술로서 해야 한다”고 했다(Yao, 1997). 한대 경학은 명경(明經)을 중시하였다. 남북조의 많은 유가들은 이미 의소의 학문을 제창하여 당대에 경학이 시작되도록 하였다.
수, 당의 정치적 통일은 남북조시대에 분열된 경학이 다시 통일되어 쇠퇴해 가는 유가의 경학도 다시 부흥하기 시작하였다. 『정관정요』 7권에 “정관4년 태종은 과거 성인들의 경적(經籍) 중 문자가 잘못된 것에 대해 중서시랑(中書侍郎) 안사고(顏師古, 574-648)에게 비서성에서 『오경』을 고증하도록 명하였다고”고 했다(Jho, 2007). 수당시기에는 과거제도가 출현하였다.『오경정의』는 각 관학의 통일교재가 되어 경학과 교학이 결합되어 더욱 밀접한 관계가 되었다.
『오경정의』는 비록 집대성된 저작이지만 독창적인 면도 있었다. 명경시험, 첩경시험은 수험생의 독립적인 사고력을 속박하고 단순히 암기만 했지 경의를 추구하지 않아 경을 아는 것과 수신하는 것이 결합되지 않는 학풍이 되자 경학도 경직되어 갔다. 당나라 문종 태화년 간에는 12경을 국학에 세우고 9경을 토대로 하여 『논어』, 『효경』, 『이아』를 합쳐 12경이라고 불렀다. 송대에는 『맹자』도 경의 항렬에 올라 모두 13경이 되었다. 통치자들이 경학을 숭상하고 경으로 사를 뽑아 13경은 줄곧 관학과 사학에서 교학의 주요 교재가 되었다.
송·원·명시기는 경학을 의심하고 궐기하던 시기로 의심에서부터 진위를 분별하고 선유들이 전주(傳注)한 것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새로운 학설을 제시하는 것, 경전의 내용을 일부 삭제하고 의리(義理)를 구하고 의소(義疏)의 학에서 심성(心性)의 학에 이르기까지 『오경정의』를 숭상하던 것에서 『사서』를 숭상하기까지 경학의 발전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철학과 도덕의 문제를 중시한 것은 송·원·명시대 경을 연구하는 유학자들에게 있어 공통적인 추세였다. 송학은 한학(漢學)을 계승한 것으로 경학연구가들은 점점 철학화, 도덕화 되었다.
정이는 “오늘날 학자는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문장에 능한 문사(文士), 경학을 강의하는 강사, 도를 아는 것은 유학자이다”고 했다(Jin et al., 1994). “오늘날의 학자에게 세 가지 폐단이 있다. 첫째는 문장에 약하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훈고에 약하다는 것이며, 세 번째는 이단(異端)에 미혹된다는 것이다. 만약 이 세 가지에 속하지 않는다면 도에 가까이 갈 수 있다”고 했다(Jin et al., 1994). 주희도 “진한 이후 성학(聖學)은 전해지지 않았다. 유자(儒者)는 오로지 장구의 훈고를 하는 것에만 치중하고, 성인(聖人)의 뜻을 다시 추구하려고 하지 않는다. 무릇 성명(性命) 도덕을 밝히는 것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Zǐsī et al., 1993).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이 송대 학술발전 추세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
이고(李翶, 772-841)가 쓴 『복성서(復性書)』는 불교를 전수하고 유가를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어 점점 사람들이 심성의 문제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송대에는 경전에 대해 의심하고 내용을 삭제하고 수정하는 분위기가 크게 일어났다.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은 『맹자』에 대해 회의를 품고 주희도 『상서』의 진실성에 대해 의심을 가졌다. 한ㆍ당시대는 경학에 대해 재고하던 시기로 사람들은 선진유가의 ‘수기치인의 학문’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다.
이들은 한편으로 주역으로 불교 철학을 대신하고 『중용』, 『대학』을 기본 경전으로 삼았다. 주희는 주소의 방법을 새롭게 적용하고 북송의 많은 학자들이 경을 연구한 새로운 결과물들을 정리하여 『사서집주(四書集注)』를 편찬했으며, 공맹의 도통을 숭상하여 『오경정의』의 지위를 되찾아 명·청시대에 이르러 학자들의 필독서가 되도록 하였다. 당대의 유학자들은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치중하여 경을 연구한 결과물이 그리 많지 않았다. 『오경정의』 후 계승자가 거의 끊겼다. 선종(禪宗)이 일어난 후 사대부들은 거의 선(禪)을 생각하고 경학도 점점 쇠미해졌다. 특히 당말 오대에 이르러 이러한 현상이 더욱 뚜렷해졌다.
북송의 유학자들은 정사를 도로 다스리는 학, 경사에 능통한 학, 문장자집의 학 등 모두 큰 문제에 착안해서 독창적인 사고로 새로운 국면을 개척하여 탁월한 학파를 이루었다. 이들은 모두 창의력이 뛰어나 학술계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켰다. 송학의 형성시기에 실제로 경, 사, 자, 집 네 부분의 학문이 점점 세력을 형성하였다. 북송시기에 세 차례의 흥학운동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본질을 밝히고 그것을 응용하는 것’이 중하층의 사의 자제들에게까지 보급되도록 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북송 이학가의 등장 후 심성의리학을 중시하여 노석(老釋)을 옹호하고 이단이 되는 것은 배척했으며 공순악(孔順樂)이 있는 곳을 찾아 기질의 변화를 논하고 “천지에 마음이 바로 서면 민생들이 목숨을 유지하고 과거 성현의 학문을 계승하여 만세가 태평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힘써 선진유가의 ‘수기치인’의 전통을 회복해야 한다고 했다. 주희는 남송시기에 활약한 사람으로, 송학을 집대성했을 뿐만 아니라 공자 이후 중국의 고대 학술을 집대성한 교육자이다. 송학의 발전은 심성(心性)의 학, 내성(內省)의 학이 점점 흥성하다가 육구연이 주학을 비평하고 갈라져 나오면서 본심을 발견하는 학문을 제창하였다.
왕양명은 양지를 통해 ‘치양지(致良知)’, ‘지행합일’ 학설의 개척자가 되었다. 송학은 ‘존덕성’, ‘도문학’을 중시하는 특색이 있다. 명나라 때 왕학이 일어나자 덕성을 존중하는 학문은 거의 학계에서 독점하다시피 하였다. 명나라 때 경학은 무엇인가 새롭게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거의 볼 수 없었고 정부에서 『오경대전』, 『사서대전』, 『성리대전』을 새롭게 수정했는데, ‘이것은 외관상으로는 완벽해 보였지만 실제로 이미 완성된 책을 베껴 위로는 조정을 속이고 아래로는 사를 속여’ ‘위아래로 서로 속이고 복리(複利)를 챙기는’것이 되었고, 조정에서는 이들 수정한 책으로 사를 뽑고 주희가 주를 한 『사서』는 국가에서 정한 교과서가 되었으며, 이런 상황에서 『오경』을 연구하는 사람, 저술을 보는 사람은 매우 적었다. 이는 자연스럽게 경학이 쇠퇴하는 국면에 들어오도록 하였다.
명말에서 청초에 이르기까지 고문경학은 부흥하는 시기였다. 가경(嘉慶, 1796-1820), 도광(道光, 1821-1850) 이후, 외환이 심해지자 사대부들은 나라가 망하는 날이 곧 올 것임을 걱정하고 백성들을 구제할 것을 생각하여 경을 읽혀 실제에 응용하고 옛것을 새롭게 고치도록 하여 금문경학이 새롭게 일어나자 제자학도 이에 따라 다시 흥성하였다. 한학(漢學), 송학(宋學)의 논쟁, 금문경학과 고문경학의 논쟁 및 고문학파의 대사인 장태염(章太炎, 1868-1936)과 금문학파의 대사인 강유위 간의 진보와 보수의 논쟁은 5·4 신문화 운동 때까지 지속 되었다.
고문경학의 부흥과 명ㆍ청시대 실학사조는 같은 시기에 형성되었다. 이러한 큰 변화의 시기에 ‘도를 밝혀 세상을 밝게 하자(明道淑世)’는 뜻을 가진 학자들은 송·명의 멸망한 역사를 참작하여 사회위기, 문화위기, 학술위기, 민족위기를 일으킨 원인을 생각하여 육경의 뜻을 지금 세상에 적합한 실학이 되도록 힘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명말 서학의 유입으로 이것이 중국의 전통학술과 충돌하여 당시 민감한 많은 사들은 서양의 학술도 일종의 실학이라고 생각하여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다.
서광계(徐光啟, 1562-1633), 이지조(李之藻, 1564-1630), 방이지, 매문정(梅文鼎, 1633-1721)은 새롭게 흥성하는 ‘질측(質測, 추측, 예측)의 학’을 환영하고 고염무, 황종희, 장학성은 경사(經史)에 능하고 경세치용 할 것을 제창하여 실학사조를 일으켰다. 고염무는 처음으로 ‘경학을 버리되 이학에 치우치지 말 것’을 제창하고 “구경을 읽어 문장을 고증하는 것에서 시작하면 문장을 고증하는 것은 음절에서 밝혀진다”고 했다(Kweon, 2008). 그는 『음학오서(音學五書』, 『일지록(日知錄)』 등을 저술하여 한 시대에 경전을 고증하는 학문의 시대를 열었다. 대진도 “송의 육구연, 명의 진왕(陳王)은 강습 토론의 학문을 폐지하고 마치 덕성을 높여 그 이름을 날린다”고 비평하고(Lee, 2005), “경에 이르는 것이 도이다. 그래서 도를 밝히는 것은 문장(詞)이다. 문장을 이루는 것은 글자(字)이다. 글자로 인해 그 문장의 의미를 알고 문장으로 인해 그 도를 알게 되는 것이다.”고 했다(Lee, 2005).
대진은 고염무의 학술사상을 계승하고 『맹자자의소증(孟子字義疏證)』, 『원선(原善)』 등의 저서를 남겼다. 청대 경학의 부흥과 사학의 흥성은 서로 영향을 주었다. 고염무, 황종희, 왕부지는 모두 경사에 능통했으며, 한·송을 두루 섭렵한 학술대사였다. 고염무는 경학에 몰두하면서도 사학을 홀시하지 않았으며, 황종희는 사학에 정통하면서 경을 연구하고 도를 밝히는데 의지가 강했다.
왕부지는 경사를 모으는데 크게 이바지 했다. 그들의 학술사상은 매우 광대하여 건륭(乾隆, 1711-1799)과 가경시대의 고증학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건륭과 가경시대에 경전을 고증하는 분위기가 크게 성행했는데, 다시 고문경학이 부흥하였다. Chén(1980)은 『중각서역인화화고서(重刻西域人華化考序)』에서 “청대의 경학과 사학은 모두 고증의 학이다. 그래서 학문을 닦는 자도 고증학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했다.
Liáng(2004)는 『중국의 300여년 학술사(중국근삼백년학술사(中國近三百年學術史)』에서 “건륭과 가경년간의 고증학은 거의 학계에서 독점하다시피 하였다”고 하였다. 이것은 청대는 고증학의 황금시대로 그 결과 고증학이 학술계를 거의 장악하여 많은 학자들이 고증학에 심취하였다.
청대의 한학은 동오(東吳), 환남(皖南) 두 파로 나뉜다. 두 파의 학자들은 경서를 광대하게 고증하는 것에서부터 역사서들과 제자서들도 고증하였다. 또한 경의를 해석하는 것에서 역사, 지리, 역산, 음률, 전장제도를 고증하여 실사구시의 학풍을 형성하였다. 또한 문헌을 정리하고 연구하여 사회에 큰 공헌을 했다. 이것은 명·청시기에 도를 밝혀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실학사조와 거리가 멀어짐에 따라 청대 통치자들에게 문자옥(文字獄)을 일으키고 문화전제주의를 보급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당시 많은 학자들이 고증학에 심취하고 있을 때, 장학성은 과감하게 “육경은 모두 역사이다”, “사학은 이른바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다”고 했다. 그는 송·명 시대의 학술대사의 경세실학의 정신을 자각적으로 알리고 사람들에서 ‘내성(內聖)’에서 ‘외왕(外王)’으로 관심을 기울여 경학에서 사학으로의 학술사조가 깊이 발전할 수 있음을 일깨웠다. “육경이 모두 역사이다”라는 경세의 이론은 당시의 학풍과 시기적으로 부합하였다.
한학을 연구하는 것은 사료를 중시하고 의리를 연구하지 않고 고증을 강의하여 실제와 동떨어졌다. 송학을 연구하는 것은 의리를 논하고 역사를 고려하지 않아 공론을 좋아하고 공적을 가볍게 여겨 각각 치우침이 있다. 그는 군자의 학술은 “세상에 치우쳐 있는 것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했다(Lee, 2011). 그는 ‘도기합일(道器合一)’의 학술체계를 마련하면 한 때 풍미했던 즉 아무것도 없는 것을 고증하는 한학과 묘당, 의리가 허무한 송학에 들어가는 폐단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건륭, 가경시대의 학자는 허신, 정현 등을 숭상하고 정주학을 경시했다. 경학으로 경학을 다스리고 고증을 중시하고 오로지 한학을 연구하여 학술이 매우 정교해졌다. 가경, 도광 이후 청 정부의 정치가 나날이 부패 되고 국력이 현저하게 쇠락해졌으며 아편전쟁이 일어나자 사회위기, 민족위기가 심각해졌다. 태평천국은 중국을 석권하고 중국과 프랑스 전쟁, 중국과 일본의 전쟁이 잇따르자 이러한 위기는 더욱 심각해졌다. 내외적으로 혼란한 상황에서 많은 지식인들은 국가를 구하고 부강하게 하기 위해 온 힘을 다 했다. 이러한 것이 학술사상에도 반영되었는데, 즉 금문경학의 부흥이다. 원래 고문학을 연구한 강유위는 요평의 저작을 읽고 감화를 받아 한편으로 요평의 문장을 인용하고, 다른 한편으로 위원, 공자진의 경으로 시정을 논하는 학풍이 일어났다.
강유위는 『신학위경고(新學僞經考』,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를 지어 “옛것으로 사회의 제도를 고치자”는 공양삼세(公羊三世)의 말은 유신 변법의 역사적 근거가 되었다. 장태염은 고문경학파 최후의 대사로 경술에 조예가 깊었으며 현실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학문을 함에 문장에는 고문과 금문이 있는데 학문에 한진(漢晉)은 없다”고 했으며(Cháng, 1994) 정치를 논하고 민족대의를 명확하게 하여 민주혁명을 고취하고자 주장하였다. 그는 고염무의 ‘경세치용’사상을 이어받고 고문경학을 주장하고 금문경학을 반대했으며 혁명을 통한 변화를 반대하여 고문경학의 집대성자가 되었다. 피석서의 글 및 청대 경학역사에는 “국가에 있어 경학은 크게 세 번의 변화가 있었다. 즉 국초에 한학이 탄생하여 한학과 송학을 이분할 수 없어 문호가 세워질 수 없었다. 두 번째 건륭 이후 고문경학이 크게 흥성하자 송학이 밀려나 실증을 강의하고 의를 강의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정통 한학이다. 셋째, 도광(道光) 이후 강의한 것은 서한(西漢)의 금문경학으로 간단하지만 심오한 말로 대의를 이야기하고 원의(原義)를 갖다 붙이는 것을 좋아하였다.”고 했다.
범문란(範文瀾, 1891-1969)은 『경학강연록(經學講演錄)』에서 “이러한 분류는 대체로 맞다”고 했다(Zhou, 2014).
경학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도 교육내용의 선택, 교재편찬, 교육과정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사학과 서원의 교육은 매우 자율적이어서 그 영향도 컸다. 금문경학은 간단하지만 심오한 말로 대의를 이야기하는 것에 치중하고 정치, 도덕적 관점에서 육경을 말하였다. 육경은 보통과(『시』,『서』,『예』,『악』))와 전문과(『역』, 『춘추』)로 구분하였다. 고문경학가는 ‘선인의 업적을 이어 말할 뿐 지어내지 않는다. 믿어 옛것을 좋아하여’ 역사 언어의 관점에서 경의를 해석하고 육경의 순서를 『역』, 『서』, 『시』, 『예』, 『악』, 『춘추』로 배열하였다.
교재와 교육과정의 조직과 안배는 학술사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는데, 대체로 금문경학가는 육경의 내용 난이도에 따라 배열하고 고문경학가들은 육경의 탄생시대에 의해 시기 순으로 배열하였다. 금문경학가는 공자는 정치가, 교육자라고 생각하고 고문경학가는 공자는 사학가, 고대 문화의 보존자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교재와 교육과정의 선택, 배치는 서로 달랐다.
학술사상의 새로운 변화는 송대 서원의 교육에 반영되었을 뿐만 아니라 명・청 이후 관학, 사학의 교재, 교육과정을 선택·조직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한학과 송학의 변천과 교육의 관계를 보면, 학술과 교육의 관계는 교육자 또는 학술대사의 교육행위의 교량이 되어 교육이 피동적으로 학술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교육실천을 통해 특히 학술사상을 교재로 삼아 교육과정을 조직하여 학술사상이 보다 간결하고 명확하고 체계적으로 되어 학술사상의 전파와 갱신에 도움을 주었다. ‘육예’는 중국 고대 학술의 총체로 공자가 첨삭하여 편찬한 교과서로 이후, 줄곧 고대 학교교육의 주요 교재가 되었다.
2. 묵가, 도가, 법가, 병가 등의 학술사상이 교육에 미친 영향
지금까지 중국 학술의 주요사상을 설명하였다. 진한 이후, 묵학이 비록 약 2천 년 동안 묻혀있었지만 멸망하지는 않았다. 유가, 도가는 묵가의 많은 사상을 받아들였다. 예를 들면 유가의 ‘대동(大同)’사상은 묵가의 ‘겸애(兼愛)’학설과 관련된다. 청대의 건륭, 가경시대에 고증학과 제자학이 성행했는데, 이때 묵학이 다시 부흥하였다. 손치양은 『묵자한고(墨子閑詁)』를 지어 역대 묵가 연구를 집대성하였다. 청말 민초에 묵자의 연구물이 끊임없이 나왔는데, 특히 묵가의 논리사상, 과학사상은 학술계의 중시를 받았으며, 이립(李苙), 진주(陳柱), 양계초, 호적(胡適, 1891-1962) 등의 학자들이 전문적으로 이에 대해 논하였다. 그밖에 북변과 인도의 인명(因明), 유럽의 형식논리학을 비교ㆍ연구하는 것도 국내외 학자들의 흥미로운 연구 주제가 되었다.
도가학파는 노장, 직하도가학자들 이후에 새로운 변화가 있었다. 진한 사이의 새로운 도가학파들은 황제의 말에 의해 노자학설을 일부 바꾸고 선진 각 학파들의 성과를 받아들여 황로학이 되었으며, 한초에 ‘무위로 다스리는’ 사상의 토대가 되었다. 『여씨춘추』도 도가사상을 수용했으며, 『회남자(淮南子)』는 도가학술을 집대성한 것이다. 사마담의 『논육가요지(論六家要旨)』에는 특히 도가의 자연주의를 높였다(Park, 2014). 동한 중엽, 도교가 탄생했는데, 노자를 교주로 봉하고 『도덕경(道德經)』을 법전으로 삼았다. 위진시기 현학이 발흥하고 『노자』, 『장자』는 삼현(三賢) 중 이현으로 여기에 『주역』이 더해져서 삼현이 되었다. 유무(有無), 본말(本末), 명교(名敎)와 자연, 말로 다 표현할 수 있는 것과 말로 마음으로 생각한 바를 다 표현할 수 없는 것 등의 범주에 대한 논변은 사람들의 사상이 경학의 속박에서 벗어나도록 하여 예술적 자각을 촉진하고 세속을 초월한 반전통정신과 독립된 인격을 갖도록 하였다.
당ㆍ송 이후 도가, 유가, 석가의 사상이 합류하고 많은 사대부들이 이러한 세 학술정신을 융합하였다. 예를 들면 소식은 노장을 숭상하고 선종(禪宗)을 좋아했다. 뿐만 아니라 유가의 ‘수기치인’의 학문을 결코 버리지 않았다. 자연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도가의 미학사상은 시인, 예술가 등을 탄생시키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자연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도가의 미학사상은 시인, 예술가 등을 탄생시키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당대부터 청말까지 『노자』, 『장자』에 관한 주석과 연구가 계속 이어졌는데, 위정, 전혁(傳奕), 왕안석, 소철, 범응원(範應元), 오징(吳澄, 1249-1333), 왕부지 등은 노자에 대해 해석하고 연구하였다. 이는 역대 시화(詩話), 문론, 예술적 담론에 노장사상으로 예술창조의 원리를 설명한 것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석도(石濤)의 일화(一畵)론은 노자의 도의 관념을 예술 영역에 운용하였다. 특히 노자, 장자가 중시한 창조적 직관은 후세의 시인,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법가사상도 그 역사가 유구하다. 한비자가 법가학술을 집대성한 후 진시황, 이사는 법가의 학술을 깊이 연구하여 중앙군주집권제를 세우는데 유리하도록 했으며, 한비의 학술사상을 실행하도록 했다. 진나라가 멸망한 후, 한대 초기 통치자는 황노의 학을 제창하고 무위로 다스렸지만 정치에는 여전히 법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도와 법을 결합하였다.
이들은 법가의 정치학설을 받아들이거나 일부 수정하여 정치이론을 혁신하는 근거로 삼았다. 한비자의 실증정신과 검증사상도 후세학자들의 중시를 받았다. 그러나 사마천(司馬遷, B.C.145-B.C.86) 같은 사람은 법가에 대해 “너무 각박하여 은혜로움이 적고(極其慘礉少恩)”, “임금을 존중하고 신하를 업신여겼으며(尊主卑臣)”, “극단적 왕권사상과 문화전제주의, 학술자유를 억압하고 나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여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선진 제자에는 유가, 묵가, 도가, 법가, 명가, 음양가, 병가, 농가, 종횡가, 소설가, 잡가, 의가 등이 있는데 학술적으로 가장 영향을 미친 것은 유가, 묵가, 도가, 법가 네 학파이다. 기타 학파들도 학술방면에서 나름대로 특색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면 병가의 『손자병법(孫子兵法)』, 『오자(吳子)』, 『사마법(司馬法)』, 『손빈병법(孫臏兵法)』, 『위료자(尉繚子)』, 『육도(六韜)』, 『삼략(三略)』은 모두 군사학의 거작이다. 송대 정부에서 반포한 『무경칠서(武經七書)』는 위에서 상술한 육부에 『이위공문답(李衛公問答)』을 집성한 것으로 중국 고대의 저명한 군사 교과서이다.
특히 『손자병법』은 그 영향이 지대했으며, 중국 고대 국사가들이 필독으로 읽는 병서로 세계에서도 매우 귀중한 책이다.
음양가의 이론은 『맹자』, 『여씨춘추』, 동중서의 사상이 어우러져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정치이론으로 발전하고 의학가, 철학가도 음양오행학설을 발전시켰다. 예를 들면 『황제내경(黃帝內經)』은 음양오행학설을 철학적 토대로 하여 체계적인 중의학설을 세우고, 주돈이(周敦頤, 1017-1073)는 『역경(易經)』의 태극관념을 결합하고 음양오행설과 배합하여 우주 변화의 이치를 설명하였다. 방이지도 이러한 순서에 의해 우주의 이치를 연구하였다. 더불어 음양오행설을 토대로 하여 유럽의 자연과학을 받아들이고 고금에 정통하고 증서를 융합하여 『통아(通雅)』, 『물리소식(物理小識)』 등을 지었으며 중국 학술사상이 실증적 근대과학정신으로 전환하도록 하였다.
주희는 청소년 시기에 유가를 중심으로 학문을 하고 점점 백가의 학설을 섭렵하였는데, “어렸을 때는 무엇이든지 배우려고 했다. 선(禪), 도문장(道文章), 초사(楚辭), 시(詩), 병법(兵法) 등 무엇이든 배우려고 해서 무수히 많은 책을 읽었다.”고 했다(Lí et al., 1980). 앞서 말한 세 명의 학술대사의 학문적 연구 경험을 분석해 보면 제자백가의 학술사상의 영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3. 외래 학술사상의 영향
중국 학술은 선진시대부터 독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지만 외래 학술사상을 받아들여 이것을 자국의 학술과 융합시켰다. 예를 들면 당대에 중국인들은 외국의 학술을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학술 정신을 가까이는 동아시아 지역, 멀게는 서양까지 영향을 주었다. 학술 교류사를 살펴보면 외래학술은 중국에 세 차례에 걸쳐 들어왔다.
첫째, 기원전 1세기 이후 불교를 대표로 하는 인도 학술이 전래 되었고, 둘째 명 중엽 이후 서양의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에 들어오면서 서양의 자연과학지식이 도입되었다. 셋째, 아편전쟁 이후 서학이 점점 동양으로 들어오고 과학과 민주사상이 들어왔다. 중국인들은 외래의 학술사상을 받아들이고 채택했으며 이를 자국에 맞게 적용하였다. 예를 들면 당대 선종(禪宗)의 형성은 불교가 중국 학술사상의 영향을 받아 중국의 전통학술 중 일부가 되었다.
서학이 점점 동양으로 들어온 후, 많은 지식인들은 그중 가치 있는 것을 받아들여 중국 학술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였다. 예를 들면 서광계, 방이지, 매문정 등은 서학을 상당히 환영했는데, 중서 과학기술을 받아들였으며 이에 정통하였다. 새로운 학술사상은 교육 실천에 반영되어 교육에 변화를 주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서광계는 “수학을 중심으로 삼고”, “경제 물리를 중시하자”는 교육관점을 제시하였다. 더불어 마테오리치(1552-1610)는 『기하원본(幾何原本)』, 『측량법의(測量法義)』, 『태서수법(泰西水法)』을 번역하고, 『측량이동(測量異同)』, 『농정전서(農政全書)』를 지어 서양의 자연과학과 지식을 동양에 전하였다. 매문정은 이것은 “마치 소호규제와 같다(略仿蘇湖規制)”고(소호는 소주와 호주 지역을 일컫는 것으로 예전에 곡물생산의 중심지로 본문에서는 서양의 자연과학에는 배워야 할 많은 내용이 있음을 의미한다) 하여 전문적으로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학교를 세우자고 주장하였다.
비록 그의 이상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과학적 가치가 매우 높은『매씨역산전서(梅氏曆算全書)』, 『고금역법통고(古今曆法通考)』 등을 편찬했다. 그는 근대 과학교육의 선도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청대 후기의 과학자들도 서광계, 매문정을 이어받아 중서의 학술사상에 정통했으며, 과학연구에 몰두하고 책을 지어 제자들에게 전수함으로써 학생들에게 중서 과학의 장점을 받아들이고, 교육의 새로운 방법을 개척하도록 하였다.
4. 연구와 교육에 관한 사학과 목록학의 기능
종적인 방면에서 중국의 많은 사서를 살펴보면 하, 상, 주 이후의 역사를 모두 단절 없이 기록하였다. 횡적인 방면에서 보면 중국의 사서는 실제로 문화사, 역대의 정치, 경제, 철학, 종교, 윤리, 문학, 예술, 천문, 지리, 수학 등을 모두 기술하고 있다. 국사(國史)의 완비, 사사(私史)의 풍부함, 많은 사론(史論)을 가지고 있다.
역사를 중시하는 중국의 전통은 역사 문헌을 보존하고 정리하며 연구하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교훈을 거울삼아 역사 편찬을 중시하며 역사를 사실대로 기재하고 사덕(史德)을 중시하는 측면에서도 이러한 점을 찾아볼 수 있다. 중국 역대의 식견이 있는 교육자는 경사(經史)에 정통했을 뿐만 아니라 역사서를 선택하고 개편하고 저술하는데도 뛰어나 직접 교재를 만들어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예를 들면 공자가 지은 『춘추』, 주희가 편찬한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황종희가 지은 『명유학안(名儒學案)』, 고염무가 편찬한 『천하군국이병서(天下郡國利病書)』, 『일지록(日知錄)』, 왕부지가 지은 『속통감론(監通續論)』, 『송론(宋論)』, 『영역실록(永歷實錄)』은 모두 교학과 연구를 결합한 학술성과물이다. 사마천의 『사기』 및 선진시기의 『춘추』, 『좌전』, 『국어』, 『전국책』 등 사서는 역대에 학교에서 사용한 교재이다.
예를 들면 “육경은 모두 역사이다”의 관점에서 분석해보면, 역사교육의 범주는 상당히 넓으며 역사는 학술사상에서 사람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중국의 사서는 많은 부분이 사학과 문학이 결합된 명편(名篇)들이며, 역사적인 사실에 충실했을 뿐만 아니라 문장도 매우 훌륭하다. 노신은 “사가의 뛰어난 문장은 무운(無韻)의 『이소(離騷)』이다”(Kim, 1999)고 하며, 『사기』를 높이 평가했다. 또한 ‘사(史)’와 ‘문(文)’의 유기적 결합이라고 했다. 그래서 우수한 역사작품을 교재로 선택하는 것은 사학교육과 문학교육의 이중 효과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중국 고대의 교육 대가들은 경사를 중시했을 뿐만 아니라 문학도 중시하였다. 경, 사, 잡, 집 네 부류 중 ‘집(集)’이 가리키는 것은 고대 작가의 시(詩), 문(文), 사(詞), 곡(曲)의 결집이다. 그중 많은 명편이 교재에 수록되어 필수 과정이 되었다.
중국의 학술 기원은 그 역사가 매우 깊고 문헌 자료가 풍부하다. 교학, 학문을 하는 것(治學), 연구는 모두 지식, 학술 영역이 무한한 반면 학습시간은 유한하므로 우리는 지식, 학술이라는 귀중한 창고를 여는 열쇠를 갖고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은 “지식은 힘이다”는 관점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지식, 학술을 분류했다(Francis et al., 2016). 그는 학술을 역사학, 시학, 신학과 철학이라는 네 개의 범주로 구분하고 인류 지식에 대해 체계적인 구분을 해서 근대과학을 분류하는 선도자가 되었다.
그는 교재의 편찬, 교육과정을 구성하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그중 실용지식을 강조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베이컨 이전에 마단림(馬端臨, 1254?-1323)은 『문헌통고(文獻通考)ㆍ경적고(經籍考)』에서 중국 역사 문헌을 경, 사, 자, 집 네 부류로 나누었는데 이는 위로는 유흠(劉歆, 미상-23)의 『칠략(七略)』의 취지를 계승한 것이고, 가운데로는 『수서(隨書)ㆍ경적지(經籍志)』의 정법(定法)을 채택한 것이며, 아래로는 『사고전서총목(四庫全書總目)』의 분류법을 알린 것이다.
학술을 논하고 그 원류를 고증하는데 도서 분류를 통해서 학술변화의 흔적을 알 수 있다. 『사고전서총목』을 편찬한 후 사고분류법은 보다 완비되었다. 『사고전서총목』은 대형총서 『사고전서』를 합리적ㆍ체계적인 분류를 한 후 편찬된 것이다. 이것은 중국 고적을 모아 네 부분으로 분류한 것으로 베이컨의 분류법과 비교해 볼 때 경부는 신학에 해당하고, 사부는 역사학에 해당하며, 자부는 철학에 해당하고, 집부는 시학에 해당된다. 지식, 학술에 대한 분류는 서로 비슷한 부분이 많다. 서로 다른 부분은 베이컨의 분류법은 인간의 이성능력(기억, 상상, 이성)에 의해 구분한 것으로 특히 자연과학지식 및 학술, 경험과 응용 간의 관계를 중시하여 근대과학정신이 담겨 있다. 그러나 사고분류법에도 도를 존중하는 것을 근본 관념으로 예술을 경시하는 사상이 있다.
비록 중국의 학술문화가 완벽하고 체계적으로 분류되었으며 사회의 질서와 국가의 법이 많은 경적에 있고 교학, 학문의 단서가 있다고 할지라도 근본정신은 상당히 고적적이지 근현대적이지 못하다. 건륭과 가경시대에는 중국의 고전학술이 성숙되고 종합화되는 시기로 『사고전서』가 편찬되었다. 이것의 편찬은 중국 고대에서 완벽하고 체계적인 학술 세계를 만든 것으로 상당히 권위가 있으며, 세계 학술 사상사에서 보기 드문 연구성과이다. 18세기 중엽 프랑스의 드니 디드로(Denis Diderot, 1713-1784)가 주편한 『백과전서』는 2,268자이지만 『사고전서』는 9억9천7백만 자로 『백과전서』보다 글자 수만 보더라도 44만 배나 많다. 이러한 광대한 학술을 이해하고 분석하기 위해 체계적인 분류는 반드시 필요하다. 『사고전서총목』은 이러한 전반적인 요구에 맞춰 편찬된 것으로 상당히 논리적이어서 독자들이 학문을 연구함에 적은 노력으로 많은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책이다.
전국시대 백가의 기능들이 많이 나누어지면서 지식분류는 더욱 중요해졌다. 순자는 ‘도에 정통한 자’와 ‘물(物)에 정통한 자’ 두 부류로 나누었다. 이것을 다시 ‘물에 정통한 자’는 ‘천(天)에 뜻을 두고’, ‘지(地)에 뜻을 두고’, ‘사시(四時)에 뜻을 둔 것’으로 세분하였다. 춘추전국 이후 백가쟁명, 학술의 자유로 인해 저서로 말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도서를 분류하고 학술의 원류를 분석하는 것이 거의 필연적인 것이 되었다. 유흠이 편찬한 『칠략』7권은 많은 도서가 학술체계를 갖추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는데, 집략(輯略), 육예략(六藝略), 제자략(諸子略), 시부략(詩賦略), 병서략(兵書略), 수술략(數術略), 방기략(放技略)에 수만 권의 도서가 기록되어 있어 학술과 교학의 발전을 촉진하였다.
『한서ㆍ예문지』는 『칠략』을 근거로 하여 편찬한 것으로 이를 통해 서한의 학술사상과 문화, 전적(典籍)의 양상을 알 수 있다. 위진남북조 시대이 순욱(荀勖, 163-212)의 『진중경부(晉中經簿』, 이충이 편찬한 『진원제사부서목(晉元帝四部書目』에서 경사자집의 사부분류법을 정했다. 왕검(王儉, 452-489)의 『칠지(七志)』, 원효서(阮孝緖, 479-536)의 『칠록(七錄)』은 이 시기 새로운 학술의 반영이다.
사회질서와 국가의 법에 관한 서적들은 사람들이 학술원류를 분석하고 학문을 함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이로 인해 사람들이 중국의 학술발전을 인식ㆍ이해하고 장악하는 대세가 되어 교재를 편찬하고 교육과정을 조직하며 학습을 지도하는데 있어 목록학은 안내자 역할을 하였다. 청대의 학자 왕명성은 십칠사상각(十七史商榷)에서 “목록학은 학문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이것으로 학문의 길을 물어야 문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고 했다(Wang, 1893). “무릇 독서의 가장 중요한 것은 목록학이다. 목록에 밝아야 독서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이에 밝지 못하면 독서를 함에 늘 혼란스럽다”고 했다(Wang, 1893). 김방(金榜, 1735-1801)도 “『한서예문지(漢書藝文志)』를 알지 못하면 천하의 책을 읽을 수 없다. ‘예문지’라는 것은 학문의 요강이며 저술의 관문이다”고 했다. 근대의 사람 요명달(姚明達, 1905-1942)은 이를 보다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즉 그는 “목록은 인류 지식의 결정체를 여는 열쇠이다. 만약 열쇠가 없다면 사람들이 문으로 들어가기 쉽지 않을 것이다”고 했다(Yáo, 1994). 학술과 교학은 서로 소통할 수 있는 매개체가 필요하다. ‘학술을 논하고 그 원류를 고증하는 것’을 취지로 삼는 목록학은 이러한 매개 역할을 하는 것이다.
목록학은 학술의 기원부터 내용과 방법까지 학술의 전 과정을 분석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므로 이들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Ⅲ. 교육내용의 시사점
중국의 고대 교육철학사상을 연구하려면 중국의 고대 학술사상의 발전·변화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학술성과가 교학의 내용에 포함되어 교육과정 내용을 선택하고, 조직하는 것이며, 이러한 성과는 후세들에게 전수된다. 학자들은 독창적이면서 지속적으로 자신의 학술을 발전시키고 탁월한 내용으로 세계의 학술 분위기를 부흥시켰다.
중국의 인문학은 상당한 수준으로 발달했는데, 공자가 인문학을 성장·발전시킨 것을 토대로 교재를 편찬하여 육예교육을 하였으며, 역대 교육자들이 육예교육을 중시하는 풍조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주희는 『四書集註』를 편찬했으며 철학, 도덕방면 등의 교육에 많은 관심을 가졌는데, 이 역시 인문학에 속하는 것이다. 이렇게 중국 학술과 교학은 밀접하게 결합 되어 인문정신을 계승하고 높이는 데 일조하였다.
실제로 중국 학술에 있어 경학은 한계가 많았지만 제자학술은 각각 나름대로 새로운 교육내용을 창조하기도 하였다. 중국의 학술은 비록 번성과 쇠퇴를 반복하는 굴곡의 과정을 거쳤지만 학술의 발전은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또한 중국인은 외래학술을 수용하고 이를 동화시키며 자국의 학술전통을 외부의 것과 융합하여 새로운 문제, 새로운 내용을 발견하고 새로운 학술사조를 형성하여 학술이 보다 높은 경지로 나아가도록 했다.
중국 학술의 큰 변화는 대체로 세 번 일어났다. 노동을 통해 축적된 원시시대의 학술은 중국 학술의 근원이 되었고, 이어진 제자백가 학술은 상고시대의 육예에서 나온 것이며, 이 시기는 중국 고대 학술의 기초가 다져지던 시대이다. 이것이 제1기의 학술이다
송대의 새로운 학술사상은 서원의 교육에 반영되었을 뿐만 아니라 명·청 이후 관학, 사학의 교재, 교육과정을 선택·조직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명 중엽 이후 서학이 점점 들어오면서 약 40년 동안 전국을 풍미했는데, 이때 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이것이 두 번째의 학술 변화이다.
세 번째 변화는 근현대의 한학과 송학의 변천에 의한 영향으로 실증 중심의 학술이 교육내용과 교육과정으로 조직된 것이다. 이것은 학술사상의 발전과 혁신에 도움을 주었다.
기원전 206년부터 1919년까지 약 2000여 년 동안 중국의 학술은 기본적으로 경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중국의 학술은 기본적으로 노신과 진인각이 개괄한 통의(通義)를 따르고 이것을 변화ㆍ발전시킨 것이다. 따라서 독창성, 연속성, 포용성, 통일성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교재와 교육과정의 조직과 안배는 학술사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는데, 대체로 금문경학가는 육경의 내용 난이도에 따라 배열하고 고문경학가는 육경의 탄생부터 시대순으로 배열하였다. 목록학은 사회질서와 국가의 법에 관한 서적들을 분석하고 학문을 연구함에 도움을 주었다.
‘내성외왕’을 위한 ‘수기치인’을 중시하였던 실증 중심의 중국 고대 학술의 발전 과정은 현대 교육과정과 교육내용이 실용정신과 지식정보를 중요시하게 되는데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Ⅳ. 결론 및 제언
일반적으로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지식을 ‘학술’이라고 부른다. 중국 고대학교의 교육내용은 기본적으로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학술이었다. 이것은 당시의 생활응용지식, 생산노동경험 및 대부분 실용과학기술로 주로 부유한 계층에서 서로 전하거나 사도들이 개인적으로 전수하였다. ‘경(經)’, ‘사(史)’, ‘자(子)’, ‘집(集)’은 자연, 사회, 사유영역 등 다양한 분야의 내용이 담겨 있다. 이러한 학술은 인재양성의 근본이 된다.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목표는 수기치인의 실학을 실시하는 것으로 내성외왕의 도를 실현하는 것이다. 한·당 이후의 관학과 사학에서의 교육은 ‘수기치인’의 내용에서 교육의 내용을 선택·조직한 것이다. 교육내용은 학술적 시각에서 주로 정치학, 경제학, 역사학, 윤리학, 교육학, 군사학, 사회학, 종교학, 예술, 문학 등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에 집중되어 있었다. 근·현대학교가 설립된 이후 학술이 발전하면서 수기치인과 관련이 있는 자연과학 분야에 인문과학과 사회과학 교육 내용이 포함되게 되었다.
중국의 학술을 연구하는 방법에 대하여 논하면 ‘문헌적 학문’과 ‘덕성의 학문’을 구분하여 객관적 과학 방법과 내성적 궁행의 방법을 채택해서 연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방법은 학술과 교육내용 양자의 관계를 매우 밀접하게 만들었다. 학술이라는 의미는 학문과 기술이라는 면이 결합된 용어다. 따라서 교육내용은 학술이라는 실제적이고 실용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학술의 교육내용은 4차산업 혁명시대에 인성이 바탕이 되는 실용교육과 그 맥이 닿아 있다.
인간의 지식이 AI의 영역확장으로 역할이 줄어들고 있는 현실을 직시한다면 ‘수기치인’을 바탕으로 하는 실용학문의 중요성이 증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015교육과정 개편으로 중학교의 ‘자유학기제’가 편성되고, 2020년까지 점진적으로 ‘자유학년제’가 실시된다. 이를 통해 생활기술을 익히고 체험중심의 학문을 실천한다는 것이 ‘내성외왕’을 위한 ‘수기치인’의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중국 고대 학술의 교육내용에 대한 선행연구 자료도 찾기 어렵고, 참고 문헌 자료도 방대하여 중국 고대 교육내용을 찾아 연구 분석하여 현대의 교육에 도움이 될 만한 후속 연구가 진행되기 곤란한 면이 있다. 그러므로 선행연구를 바탕으로 한 다양하고 객관적인 이론적 배경을 도출해 낼 수 없는 부분이 본 논문의 한계점이다. 하지만 본 논문을 계기로 연구의 한계를 극복하고 고대 중국 학술의 교육내용에 대한 연구가 활성화 되기를 제안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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