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도세자의 죽음을 극복한 정조 : 외상 후 성장의 관점에서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understand how King Jeongjo was able to overcome the trauma of the tragic death of his father, Crown Prince Sado. In order to analyze the psychological changes that Jeongjo went through as he grew after suffering a traumatic event, we applied classical analysis research methods. We extracted and reviewed information from literature sources and related materials, extracted parts of the selected materials that were deemed valuable, and read and analyzed them repeatedly. After examining the meaning of the trauma experienced by Jeongjo and how he overcame it and grew through the analysis, we discussed the findings with fellow experts. Key research findings include: First, as a result of analyzing the family structure to understand King Jeongjo's life, it appears that although his grandparents and father had unstable psychological characteristics, his psychological state was able to be stable thanks to his mother, Lady Hyegyeong Hong, who had a realistic disposition. Second, although Jeongjo experienced trauma that could be considered child abuse by today's child welfare standards, he showed signs of post-traumatic growth, such as changes in his perspective on himself and the world, changes in his interpersonal relationships, and changes in his perception of life. In particular, the various traumas he experienced during his childhood and the process of overcoming them seem to have led to a social concern for the weak, which allowed him to deeply empathize with the lives of the people by sublimating his personal pain into a social pain. Third, as a result of analyzing the factors that influenced Jeongjo's post-traumatic growth, it was found that these factors included his grandfather Yeongjo's permission to enter the Seungjeongwon Diary, his mother Hyegyeonggung Hong's wise role, his father Crown Prince Sado's love for his son, and Jeongjo's outstanding personal capabilities. The significance of this study lies in the fact that it confirms that King Jeongjo, who experienced post-traumatic growth, deeply sympathized with the suffering of the people and made efforts to resolve it, which led to his becoming a monarch who loved the people.
Keywords:
Jeongjo, Trauma, Post-traumatic growthI. 서 론
인간의 삶에서 고통은 피할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옅어지는 고통도 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심리적 상처로 남게 되는 외상인 트라우마는 개인의 삶을 망가뜨릴 수 있다. 다양한 외상 중에서 부모의 죽음은 특히 그러하다.
조선왕조에서 연산군과 정조는 비극적으로 부모를 잃은 외상의 경험은 동일할 수 있지만, 그 외상에 대한 대처는 완전히 상이하다. 연산군은 당대는 물론이고 지금까지 폭군의 아이콘으로 기억되지만, 정조는 자타가 공인하는 ‘성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들은 왕이라는 유사한 성장환경과 부모의 죽음이라는 동일한 외상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갔다. 이러한 서로 다른 삶은 의문의 여지가 남는다. 따라서 정조가 비극적인 외상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본 연구의 우선적인 목적이다.
정조는 조선 22대 임금으로 18세기의 문화 중흥기인 조선 후기 시대를 이끌어간 왕이며, 국가 최고 통치자로서 세종과 함께 조선시대에 가장 많은 업적을 남긴 위대한 성군으로 평가받는다(Kim and Lee, 2024). 또한 왕권을 강화하려는 정책들을 통해 급변하는 조선 후기 시대에 많은 업적을 남긴 개혁 군주로 기억된다. 정조가 이런 많은 업적을 세운 인물로 기억되지만, 어린 시절 할아버지인 영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갇혀 죽게 한 사건은 정조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정조가 겪은 외상 사건과 이를 극복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이해하면서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성인기 이전에 겪은 부모의 죽음은 성인기의 경험보다 더 치명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Ahn, 2005). Moon(2014)은 유년 시절 겪은 부모상실경험을 ‘재앙’이라고까지 표현했다. 이 시기의 부모는 생존을 위한 의존의 대상이므로, 그러한 존재의 상실은 ‘재앙’처럼 다가온다는 것이다. 유년기에 겪은 부모의 상실로 인한 슬픔은 개인의 성장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정조가 겪은 임오화변 역시 정조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외상과 관련한 연구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의 예방과 외상 사건을 겪기 이전의 기능으로의 회복에 주로 관심을 두었다(Choi, Lee and Kim, 2005). 그러나 1990년대 중반부터 국외에서 외상 이후 경험하는 긍정적 변화에 대한 연구가 활성화되면서 외상후 긍정적 변화의 가능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Richard and Lawrence, 1995). 이러한 긍정적 변화를 ‘외상 후 성장(Post-Traumatic Growth: PTG)이라고 명명하며, 충격적인 외상 사건 이후 오히려 이전의 삶보다 긍정적으로 변화하는 것에 주목하였다. 즉, 외상 사건이 단순히 심리적 상처를 남기는 사건이 아니라 이전의 삶을 뛰어넘는 성장을 경험하게 하는 촉발사건으로 다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외상 후 성장’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Lawrence and Richard(2013)는 그들의 저서에서 외부 환경적 요인을 강조하며, 가족 내, 집단 내, 넓게는 국가 내에서 외상 사건과 외상 후 성장 경험이 공유됨을 설명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부모의 죽음은 기본적으로 가족구조와 관련이 있고, 가족구성원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건으로 이해해야 한다. 또한 이 이론에서는 외상 사건 이후 경험되는 긍정적인 변화를 자기와 세상에 대한 관점의 변화, 대인관계의 변화, 삶에 대한 인식의 변화로 꼽는다. 본 연구에서도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외상을 경험한 정조가 이를 극복하여 어떠한 외상 후 성장을 경험하였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해당 이론에 근거하여 분석하였다. 이러한 분석과정을 통해 정조가 개혁 군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다음과 같은 연구 문제를 선정하였다.
첫째, 정조의 삶을 설명할 수 있는 가족 구조는 어떠한가?
둘째, 정조가 겪은 외상과 이를 극복하여 어떠한 외상 후 성장을 경험하였는가?
셋째, 정조의 외상 후 성장에 영향을 미친 요인은 무엇인가?
Ⅱ. 연구 방법
본 연구는 외상 사건을 경험한 정조가 어떠한 심리적 변화 과정을 통해 성장하였는지를 살펴보고자 하였고, 이를 위해 Park(2008)이 제안한 고전분석 연구방법을 적용하였다. 고전 속에 숨어 있는 지식을 발견하고 이를 가설 연역적 방법으로 연구해가는 고전분석 연구방법으로, 해당 연구방법을 적용하여 다음과 같이 수행하였다. 첫째, 정조 관련 문헌 사료를 수집하고, 이 중에서 연구에 참고할 수 있는 자료를 선정하였다. 왕으로서의 정조를 기록한 사료로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와 한중록을 참조하였다. 또한 정조가 직접 기록한 자료인 존현각일기(尊賢閣日記), 일득록(日得錄), 홍재전서(弘齋全書) 등의 일부를 참고하였다. 아울러 정조와 관련하여 기존의 심리학적 논문 및 역사학자의 저서와 관련 정보를 추출하여 검토하였다.
둘째, 선정한 자료 중 외상 후 성장과 관련한 가치를 가진다고 판단되는 부분을 추출하였다. 이러한 지식의 추출을 위해 일차로 내용 해독에 주안점을 두고 읽은 뒤, 반복 읽기를 시행하였다. 되풀이하여 읽는 과정에서 추출하고자 중점을 둔 내용은 정조가 경험한 외상과 이와 관련된 감정과 의미 부여이다. 얻어진 사실을 관련 연구 자료와 함께 분석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이렇게 포착된 문헌의 내용을 토대로 외상 후 성장의 관점에서 의미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 내용을 통해 정조가 경험한 외상의 의미와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여 성장하였는지를 검토하였다. 또한 정조가 외상을 극복하며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사회적 지지체인 가족이 미치는 영향도 확인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검토한 내용은 사학 전공 박사 1인과 상담심리학 전공 박사이자 상담심리전문가 자격을 갖춘 전문가 1인과 논의하며 연구자가 분석한 내용을 검토하여 연구의 타당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Ⅲ. 연구 결과
1. 정조의 가족구조
정조는 1752년에 영조의 둘째 아들인 장헌(사도)세자와 혜빈 홍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759년 8세의 나이로 세손에 책봉되었고, 1762년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자 횡사한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1775년 82세의 영조가 대리청정을 시켰고, 다음해 3월 영조가 죽자 25세의 나이로 조선 제22대 왕에 즉위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하는 불행을 겪은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당쟁에 희생되었듯이 항상 죽음의 위협 속에서 세손 시절을 보내야 했다. 이 기간 동안 철저히 내면을 숨기며 정치적 발언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왕위에 오르자 태도가 달라졌다. 즉위하자마자 규장각을 설치하고, 그의 즉위를 방해하던 정후겸, 홍인한, 홍산간, 윤양로 등을 제거하고,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세자로 바꾸었다.
영조는 무수리 출신의 숙빈 최씨에게서 1694년에 태어났다. 이복 형인 왕자 윤(경종)은 희빈 장씨에게서 태어났으며, 33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경종은 즉위하긴 했으나 병으로 인해 제대로 정사를 돌볼 수가 없었다. 당시 집권당이었던 노론측의 건의로, 경종 즉위 1년 만인 1721년에 연잉군(영조)는 왕세제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남인 목호룡을 매수하여 노론측 일부 인사가 경종의 시해를 도모했다는 고변을 하게 해 임인옥사를 일으켰고, 임인옥사의 사건 보고서에 왕세제도 모역에 가담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었다. 모역에 가담한 왕자가 살아남은 전례는 없었으나 연잉군 외에는 왕통을 이을 왕자가 없었으므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당쟁 속에서 생명의 위협마저 느끼며 가까스로 1724년 영조는 왕위에 올랐다. 영조는 정성왕후 서씨와 계비 정순왕후 김씨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하고, 정빈 이씨와 영빈 이씨에게서 효장세자와 장헌세자를 얻었다. 하지만 큰아들인 효장세자는 세자 책봉 후 요절했기 때문에 둘째 아들인 장헌세자 선이 세자에 책봉되었다.
영조실록에는 영조의 성격이 급하고 감정적이며 변덕스러웠다고 기록되고 있다(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2015). 특히, ‘노하다(怒)’라는 표현이 135회, ‘크게 노하다(大怒)’는 16회 등장하여 영조가 화를 자주 내고 감정 조절에 어려움을 겪었음을 보여준다.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는 매우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였고, 이러한 성격으로 인해 감정의 기복이 심한 영조가 그를 믿고 의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Jeong(2010)은 영빈 이씨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해 자살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혜경궁 홍씨는 영빈 이씨와 사이가 아주 좋았으므로 영빈 이씨에게 병이 있었다면 혜경궁의 일기에 그러한 내용이 기록되었을텐데, 그런 내용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영빈 이씨가 죽기 전까지 일기가 잘 기록되었다가 영빈 이씨가 죽은 다음에 갑자기 기록이 중단되었다고 하며, 영빈 이씨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혜경궁 홍씨가 거의 공황상태에 빠진 것 같다고 언급하면서, 영진 이씨의 사인을 자살로 본다고 하였다.
사도세자는 정조를 포함해서 다섯 명의 아들과 세 명의 딸을 두었다. 세자의 신분이었지만 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27세에 죽음을 맞이하였다. 사도세자는 영조가 첫 번째 아들을 잃은 뒤 수년간 후사가 없다가 41세에 얻은 아들이다. 출생 즉시 원자가 되고 다음 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을만큼 영조의 기대를 받았다.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가 기록한 한중록에서는 “천성이 크게 너그러우시고 도량이 활당하시며 사람에게 신의가 두터우셔서, 아랫사람에게도 믿음직하게 말씀하시고”, “타고난 성질이 침착하고도 무게가 있음을 알 수 있다”라고 하며 사도세자가 성군의 자질을 지녔음을 기술하였다. 성격이 급했던 영조가 수시로 세자를 불러 야단치며 충돌하였고, 이로 인해 세자가 천성을 잃게 되었다고 해경궁 홍씨는 기록하고 있다.
한중록에서는 사도세자의 우울증상, 불안증상 혹은 정신병적 증상을 의심할 수 있는 내용들이 있다. 영조 24년(1748년)에 “소조께서는 날이 흐리거나 겨울에 천둥이 치면, 또 무슨 꾸중이나 나실까 근신하시고 염려하여 일마다 두렵과 겁을 내므로, 사악하고 망령된 생각이 다시 들어 병이 점점 깊어지는 징조가 드러났다”고 하고 있는 것에서 우울증상을 유추해볼 수 있다.
영조 30년(1754년)에 “평소에도 꾸중을 많이 들었는데 그때 여러 번 엄교가 그치지 않으시니, 날마다 두려움에 떨며 지내셨다”는 기록을 통해 불안증상을 짐작할 수 있다.
영조 31년(1755년)에 “어머님의 병환을 뵈러 가셨다가 아무런 잘못하신 일도 없이 그렇게 되셨으니 섧고 원통하여 ‘자살하련다’ 하시고 겨우 진정은 하셨다”, “그 날 그 일을 지내시고 가슴이 막히셔서 청심환을 잡숫고 기운을 내시며 ‘아무래도 못살겠다’하시고서, 저승전 앞뜰에 있는 우물로 가셔서 떨어지려 하시니, 그 놀라운 상황과 위대로운 모습이야 이럴 것이 어디 있으리요”라는 기록에서 자살사고와 자살행동이 동반되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의심할 수 있다.
영조 33년(1757년)에는 “6월부터 화증이 더하셔서 사람 죽이기를 시작하셨는데, 그때 당번내관 김환채를 먼저 죽여 그 머리를 들고 들어오셔서 나인들에게 효시하시매, 내가 그때 사람의 머리 벤 것을 처음 보았으니, 흉하고 놀라움에 어찌 이를 수가 있으리요”, “병환은 점점 더 하시어 사람을 죽이시는 길이 나매, 인심이 두려워하고 언제 죽을지를 몰라 하니 그런 모양이 어디 있으리요”라는 기록에서 폭력적이고 충동적인 모습과 부적절한 행동을 하고 있음이 나타난다.
영조 36년(1760년)에 “그 해는 병환이 더욱 깊어 심해지시고 또 대조께서 책망하심도 나날이 심하시니, 격한 감정은 점점 커지시며 의대병도 더 극심하게 되셨다. <중략> 지나실 때 혹 미처 피하지 못하고 얼른이라도 보이면 그 의대를 못 입으시어 벗으시고, 비단 군복 한짝을 입으려 하시면 군복 몇몇 벌을 짝을 지어 무수히 불태우시고, 겨우 한 벌을 입으셨으니”의 기록에서 피해사고와 함께 환시도 의심해볼 수 있다.
이러한 기록에 근거하여 영조와의 관계에서 사도세자는 심한 정신적 고통을 받았고, 계속되는 정신적 불안과 분노 속에서 정신적 병을 얻게 되어 병증이 점차 심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혜경궁 홍씨는 노론이었던 홍봉한의 딸로 10세에 동갑내기 사도세자와 결혼하여 세자빈이 되었다. 16세가 된 1750년에 첫째 아들 의소세자를 낳았으나 2년만에 요절하였다. 그해 가을 정조를 낳게 되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폐서인시켜 세자빈 홍씨도 더 이상 세자빈이 아니었고, 28살에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갔다. 얼마 되지 않아 사도세자가 복위되면서 세자빈 신분을 되찾고 궁궐로 복귀한다. 궁궐로 재입궁한 뒤 몇 개월이 지나 만난 영조에게 “저희 모자가 보전함은 모두 전하의 성은이로소이다”라며 감사의 인사를 했다. 자신을 원망하지 않는 홍씨의 태도에 영조는 “내가 너를 볼 마음이 어려웠는데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니 아름답구나”라며 그녀의 효행을 칭찬하였다. 영조의 신임을 얻으며, 물러설 때와 자신을 낮출 때를 알았던 인물로 보인다.
정조는 왕으로 즉위됨과 동시에 외척 세력 제거에 착수하였다. 당시 가장 큰 외척 세력이었던 홍봉한 계열은 와해되었고, 혜경궁 홍씨 친정은 쇠퇴하여 권력에서 배제되었다. 하지만, 완전히 몰락하지는 않았고 외척으로서의 명맥을 유지하며 정조의 국정 운영에 간접적으로 참여하였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을 통해 이러한 상황과 자신의 입장을 기록하며 가문의 복권을 위해 노력했다.
2. 정조의 외상 후 성장
정조는 11세에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격하는 외상을 경험하였다. 특히,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의 과정은 불볕더위 속의 엄중한 감시 속에서 비참하고 치욕스러웠으므로, 정조의 애통함 또한 컸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 이전부터 아버지 사도세자와 할아버지 영조의 갈등이 심해져 갔었으므로, 정서적 불안을 경험했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임오화변 이후에는 잠시 서인의 신분이 된 어머니의 사가에 내쳐지기도 하고, 아버지의 장례조차 제대로 참여하지 못하게 된다. 현대의 아동복지 관점에서 볼 때, 임오화변과 그 전후 상황은 어린 정조에게는 폭력적이고 불안정한 가정 환경에 노출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지금의 기준으로는 아동학대에 해당한다.
왕실의 대통을 잊기 위해 동궁의 지위를 회복하였으나, 어려서 죽은 백부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어머니와 상당 기간 이별한 채 지내면서 정체성의 혼란과 깊은 슬픔을 내비쳤다(Ku, 2020). 정체성을 형성할 청소년기에 강제적인 양자 입적과 어머니와의 물리적 단절은 정체성 상실로 연결지을 수 있다.
왕이 되기 위한 과정을 밟아가는 중에서도 임오화변을 주도한 직권당인 노론과 일부 척신들에 의해 끊임없이 감시당하고 멸시당하는 ‘위협’의 시기를 보낸다. 정조가 직접 집필한 ‘존현각일기’에는 하루하루가 바늘방석에 앉은 듯 불안하고 고통스러웠다고 하고 있다(Kim, 2019).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과 당시의 정치 상황은 정조의 생애에 큰 영향을 끼쳤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정조는 즉위와 동시에 49세 승하의 날까지의 삶을 정치에 헌신하며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을 시행하였다(Lee, 2021). 학풍과 문예를 부흥하기 위한 규장각 설치, 장용영의 설치, 병폐가 심했던 군영체계를 정비, 영조의 탕평 한계를 뛰어넘는 준론탕평의 실현, 개혁적 신도시로 불리는 화성의 축조 등의 업적이 있다. 정조실록 1권 부록에 수록된 정조대왕 묘지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2015).
왕인 성인이었다. 사도(斯道)의 정체를 밝혀내고 사도가 지향할 바를 주장하였다. 왕이 한 일은 복희·신농·문왕·무왕이 했던 일이며, 왕이 한 말은 공자·맹자·정자·주자가 한 말이었다. 앞으로 천세 후에 옛것을 논하는 자가 있다면 아마 이를 <시경>의 청묘(淸廟) 악장에다 실어 연주하여 역시 한 사람이 창을 하면 세 사람이 감탄하리라. 여기에는 특히 남들의 귀와 눈에 배어 있는 천덕(天德)·왕도(王道)만을 추려 뽑아 굉장한 유자이고 현철한 임금이었던 그의 법도를 이 정도로 소개했을 뿐이다.
(정조실록 1권 부록, 정조대왕 묘지문)
이와 같이 정조는 ‘성인’이라는 평가를 사후에 받으며, 자타가 공인하는 군주로 알려져 있다. 정조의 삶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다양한 매체에서도 척신과 노론 벽파의 위협 속에서도 꿋꿋하게 개혁을 수행해 나가는 군주의 모습이 형상화되어 있다. 비극적인 역경을 극복하고 성장에 이르러 ‘성군’으로 자리매김하는 변화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즉위 직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자기노출 선언은 의미심장하다. 공식적으로는 죽은 백부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즉위한 정조는 지지기반이 채 잡히기도 전에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으로 하고, 묘소와 사당을 한 단계씩 추존한다. 사도세자의 복권과 추모를 통해 비극적으로 사망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외상을 극복해 나간 것으로 볼 수 있다.
정조가 애민 군주임은 많은 역사서에 기록된 사실이다. 이는 더 넓은 차원의 사랑으로 승화하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성균관 유생들 속에서 당파를 가리지 않고 많은 인재를 적절하게 등용하고 서얼 차별을 완화하였다. 사회적 신변 차별을 완화하는 개혁을 통해 백성들에게 희망을 심어주었다.
둘째, 초계문신제를 실시하였다. 기존의 과거 시험만으로 인재를 뽑는 방식에서 벗어나 재능 있는 신진 인물들에게 기회를 제공하여, 백성들에게 실력만 있다면 출세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셋째, 수원 화성을 축조할 때 강제 노동을 최소화하고 노동자들에게 정당한 임금을 지급하였다. 또한 거중기를 통해 백성들의 노동 부담을 줄여주었다.
넷째, 금난전권을 폐지하여 소규모 상인과 백성들도 자유롭게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팔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였다. 이는 경제 구조를 개혁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개선하는 중요한 조치였다.
다섯째, 백성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 직접 어찰(御札)을 보내거나 신하들에게 백성들의 의견을 전달받아 정책을 결정하였다. 이는 왕과 백성 간의 거리를 좁히고 민심을 직접 챙기는 정책으로 평가된다.
정조는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통해 권력 다툼의 희생자가 되는 약자인 백성의 고통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위에서 제시한 정책들은 단순한 정치 개혁이 아니라 자신이 경험한 고통을 바탕으로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해결하려는 노력이다.
일득록 처사편에서 정조는 “모름지기 일의 중요한 근본을 먼저 세우고 그 다음으로 세부의 조목을 정리해야 한다”, “일을 처리할 때 점진적으로 하지 않으면, 기상이 다급해지고 위축된다. 빠른 효과를 구하지 말고, 반드시 원대한 계획을 품어라. 이것이 오늘날의 급선무다”라고 기록했다. 이 기록에서 장기 계획을 세워 급하지 않게 차근차근 나아가는 정조의 삶의 태도를 볼 수 있다. 장기 계획은 미래의 ‘큰 그림’을 그리는 뜻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정조의 ‘큰 그림’은 일차적으로는 역적의 오명을 쓰고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아버지의 신원(伸冤)과 추숭(追崇)에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는 데 있어서 신중하고 단계적인 접근을 택했고,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단순한 복수의 문제로 보지 않고 인의(仁義)의 정치라는 유교적 틀로 접근했다. 사도세자의 명예 회복과 관련한 어떠한 시도도 있어서는 안된다고 밝혀왔던 조부의 뜻을 자칫 거스르는 행위로 비출 수 있으나 효(孝)를 행한다는 명분으로 하였다. 정조는 아버지의 명예 회복을 개인사가 아닌 정치 구조 개선의 계기로 삼으며 정치적 갈등을 최소화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외상의 고통을 극복할 수 있었고, 성장의 발판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모든 인간의 행동에는 목적이 있으며, 미래에 최종적으로 실현될 상상을 그려보는 행위만으로도 인간의 현재 행동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고 설명하고 있다(Kim and Lee, 2024). 그러한 목적이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유용한 생활양식을 바탕으로 해야 개인의 행복과 공동체의 행복도 함께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조의 삶 속에 표현된 애민 정신에는 높은 사회적 관심이 잘 드러나 있다. 백성에 관한 관심과 애정, 연민, 그리고 백성들의 삶에 억울함이 없길 바라는 높은 관심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것은 정조가 유년 시절부터 겪어온 다양한 외상과 극복과정을 약자에 대한 사회적 관심으로 승화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자신의 경험을 개인적 차원에서 살피고 이를 넘어 사회의 아픔을 관찰하고 공감한 것으로 보인다. 자신과 비슷한 외상과 고통을 경험한 사회적 약자인 백성에 대한 깊은 공감은 외상의 극복과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3. 정조의 외상 후 성장에 영향을 미친 요인
정조는 아버지의 비행이 소상히 기록된 상황을 안타까워하며 한으로 받아들인 듯하다. 세손인 정조의 간곡한 요청을 받아들여 영조는 사도세자의 임오화변 당시 기록이 담긴 승정원일기의 세초를 허락한다. 영조 또한 명분은 옳았으나 행위의 정도가 심했음을 인정하며 세초를 허락한 것이다. 사도세자의 사망 후 금기시되었던 이야기였고, 할아버지 영조의 성격이 과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조가 영조에게 부탁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이전부터 할아버지와의 관계가 안정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세초 상소를 올리고 수은묘(사도세자의 묘)에서 정조가 엎드려 잔디를 어루만지며 옷소매가 온통 젖도록, 날이 저물 때까지 목 놓아 울었다는 기록을 보면, 영조의 세초 허락이 회복의 큰 실마리였음을 알 수 있다(Lee, 2021). 세초 논의를 통해 정조는 아버지의 오명을 덜어낼 수 있었고, 행위 당사자였던 영조의 허락을 통해 정당성도 확보하였으므로, 외상 후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혜경궁 홍씨는 남편의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서 아들 정조가 복수심을 갖지 않고 할아버지 영조의 성은에 감사하라고 가르쳤다. 이는 개인의 감정과 정치적 현실 사이의 균형을 잡는 지혜를 가르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교육은 정조가 외상으로 인한 내적 갈등을 극복하고 성군으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궁궐로 다시 돌아온 뒤, 시아버지와의 첫 만남에서 감사의 말을 전하여 영조의 신임을 얻는다. 이러한 행동은 할아버지 영조와 손자인 정조의 유대감을 쌓을 수 있는 데 큰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세손인 정조가 영조와 살게 되면서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와 이별할 때, 혹시라도 어린 아들이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울면 할아버지가 섭섭해할까봐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났다(Seol, 2016). 혜경궁 홍씨의 이러한 현명하면서도 강인함은 정치적 혼란 속에서 아들을 보호할 수 있었고, 정조의 심리적 안정감과 성장에 크게 기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존현각일기’에서 “어린 시절 아버님께서 나에게 글을 가르쳐 주시며 ‘바른 마음을 잃지 말라’고 하셨다. 그 말씀을 평생 마음에 새기며 살고자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중록’에서도 “세자가 늘 세손을 품 안에 끼고 경서를 읽으며, 어진 임금이 되는 길로 일러주었다”, “세자는 세손을 더욱 아끼고 사랑하여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였으며, 혹시라도 자신의 불행이 세손에게까지 미칠까 염려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도세자가 비록 정신증적 증상으로 인한 비행을 저질렀지만, 아들인 정조에게는 따뜻한 아버지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정조는 ‘존현각일기’에서 “아버님을 여읜 슬픔이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듯하다.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으며, 밤마다 꿈속에서라도 아버님을 뵙고 싶을 뿐이다”, “밤이면 꿈속에서라도 아버님을 뵈올 수 있을까 기대하나, 꿈에서도 만나지 못하면 그 슬픔이 더 깊어진다”고 기록하며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을 표현하고 있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가르침과 사랑이 바탕이 된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정조가 왕으로 즉위한 이후 아버지의 명예를 되찾겠다는 강한 의지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금을 다룬 사서 특유의 과장된 표현일 수 있으나, 첫돌이 왔을 때 의젓하게 책을 읽었다는 사서의 기록과 다섯 살에 보여준 학문에 대한 천재성과 진중한 태도, 그리고 유년 시절 할아버지 영조와의 문답 등에서 자주 보이는 기록 등에 근거하여 정조는 어려서부터 남다른 학문적 소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 기록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왕이 함양과 성찰이라는 성리학 이론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이는 정조의 학문적 자신감을 엿볼 수 있다.
정조가 왕세손 시절부터 쓰던 ‘존현각일기’와 정조가 직접 기록을 시작하여 이후 승정원 관리들이 기록하여 공식적인 국정 기록으로 발전된 ‘일성록’을 통해 성찰할 수 있는 힘이 강화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존현각일기’에서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깊이 성찰하며 어떤 왕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고민은 이후 정조가 탕평책 개혁정치를 펼치는 데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존현각일기’에는 세손 시절의 외로움과 두려움이 담겨 있지만, 이러한 감정을 글로 정리하며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었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정치적 갈등 속에서 성장한 정조는 ‘일성록’을 통해서 왕권 강화와 신하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지 깊이 고민하였다. 이러한 경험과 성찰을 바탕으로 신하를 활용하는 법, 정치적 균형을 맞추는 법을 익혀나갔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일성록’에서 정조는 각종 위기 상황과 대응 전략을 분석하고 기록했다. 실제로 규장각을 설치하고 신진 인재를 등용하는 등의 개혁 정책을 시행하며, 국정 운영에서 성찰의 결과를 실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학문적 역량과 기록의 습관은 정조가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정조의 탁월한 역량이 외상 후 성장을 넘어서 정조가 조선 역사에게 가장 개혁적인 군주로 자리잡는 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Ⅳ. 결 론
본 연구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이라는 외상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성군으로 기억될 정도로 어떻게 그 외상을 극복하고 성장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본 연구의 결과를 중심으로 논의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정조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 가족 구조를 분석한 결과, 할아버지인 영조는 급격한 성격 변화와 콤플렉스로 인해서인지 과격하고 쉽게 화를 냈던 것으로 기록된다. 할머니인 영빈 이씨는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로 감정기복이 심한 영조와는 반대의 성격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사인으로 자살의 가능성을 언급하는 의견도 있어서 심리적 불안정한 상태도 의심할 수 있다. 아버지 사도세자는 정신증을 의심할 수 있는 비행을 보이고 있어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성격이나 심리적 상태가 안정적이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가족 구조에 근거하면 정조의 심리적 상태가 불안정하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외상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조의 불안정한 심리상태를 의심할 근거는 없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철저하게 내면을 숨기며 때를 기다릴 줄 아는 내적 힘이 컸던 것으로 보이고 안정적인 심리상태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궁궐로 재입궁한 뒤에 영조에게 감사인사를 전하며 자신을 낮추고, 정조의 국정운영에도 직접적으로 나서지 않고 ‘한중록’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기록하며 현실적으로 행동하고 있다.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현실적인 성향과 안정적인 양육태도가 정조의 안정적인 심리상태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둘째, 정조는 아버지 죽음이라는 외상을 경험하였던 것에 더불어 그 전후 상황의 가정환경이 불안정하여 지금의 아동복지 기준으로 보면 아동학대 수준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정체성을 형성할 청소년 시기에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 죽은 백부의 양자로 입적하면서 정체성의 혼란도 경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한, 왕이 되는 과정에서도 당시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끊임없이 감시당하고 멸시당하며 보통 사람의 멘탈로는 견딜 수 없는 시기를 겪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조는 Lawrence and Richard(2013)의 이론에서 주장한 자기와 세상에 대한 관점의 변화, 대인관계의 변화, 삶에 대한 인식의 변화라는 외상 후 성장의 양상을 보인다. 먼저 자기와 세상에 대한 관점의 변화는 외상을 극복하며 균형잡힌 자기상을 형성하여 세상에 대해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시각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정조를 ‘성인’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그의 성장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자신의 취약성을 숨기지 않은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자기노출 선언은 스스로가 인식하고 있던 것보다 자신의 힘이 강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변화과정을 경험하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다음으로, 대인관계의 변화는 서로 지지하며 상호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인식이 증가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정조는 애민이라는 넓은 차원의 사랑으로 대인관계의 변화를 경험하며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이라는 자신의 고통을 바탕으로 약자인 백성의 고통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백성들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정치개혁으로 이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삶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삶의 의미가 바뀌고 작은 것들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며 삶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정조는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는 데 있어서 단순한 개인의 복수의 문제로 접근하지 않고 정치 구조 개선의 계기로 삼으며 단계적으로 신중히 접근하였다. 또한 유년 시절 겪어온 다양한 외상과 극복과정은 약자에 대한 사회적 관심으로 이어져 개인적 차원의 아픔을 사회적 차원의 아픔으로 승화하며 백성들의 삶에 대해 깊이 공감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셋째, 정조의 외상 후 성장에 영향을 미친 요인을 분석한 결과, 할아버지 영조의 승정원일기 세초 허락,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지혜로운 역할, 아버지 사도세자의 아들에 대한 사랑, 정조의 탁월한 개인적 역량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먼저, 영조가 임오화변 당시 기록이 담긴 승정원일기의 세초를 허락한 것은 정조에게는 행위 당사자의 잘못 인정을 통한 허락이었으므로, 아버지의 명예 회복에 대한 정당성 확보와 심리적 회복이라는 측면에서 의미가 크다. Chang(2018)의 연구에서도 심리적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 외상 경험자에게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을 통해 피해자는 심리적 안정을 찾았고, 이것이 외상 후 성장을 촉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조에게 있어서도 영조가 행위의 정도가 심했음을 인정한 것은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이라는 외상을 긍정적인 성장의 원천으로 삼을 수 있었던 계기가 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어머니 혜경궁 홍씨는 남편의 죽음에 대해 아들이 복수심을 갖지 않고, 절대 권력자인 할아버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도록 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다. 혜경궁 홍씨의 이러한 역할이 폭군이었던 연산군과 달리 정조가 개혁 군주로 성장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볼 수 있다. ‘한중록’에서도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회고하며 슬픔을 드러냈지만, 직접적인 복수는 언급하지 않았던 것에서 그녀의 현실적인 성향을 확인할 수 있다. 혜경궁 홍씨의 현실적인 태도는 정조가 정치적으로 신중하게 행동하도록 유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복수심은 침습적 반추를 증가시키는데, Ko and Rhee(2018)의 연구에서도 침습적 반추는 외상 후 성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침습적 반추의 부정적인 영향을 완화하여 외상 후 성장을 촉진지키는 것은 혜경궁 홍씨의 현실적인 태도와 같은 정서조절방략이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아버지가 비록 정신증적 증상으로 인해 비행을 저질러 가족들을 힘들게 하였지만, 아들을 품 안에 끼고 책을 읽어주는 따뜻한 분위기를 경험하였으므로, 아버지의 사랑이 정조에게 충분히 전달될 수 있었을 것이다. So and Han(2021)의 연구에서도 부모의 온정적 양육태도를 높게 지각한 자녀일수록 외상 후 성장 수준이 높았던 것으로 확인된다. 부모의 온정적 양육태도는 자녀의 의도적 반추수준을 높여 외상 후 성장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는데, 이는 외상 경험을 긍정적으로 재해석하는 능력을 향상시켜 외상 후 성장을 촉진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조의 탁월한 개인적 역량이 외상 후 성장의 중요한 요인이 된다. 정조는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학문적 소양과 학문적 자신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Kim and Choi(2017)의 연구에서도 전문 치료자들이 외상 후 성장에 있어서 인지적 요인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인지적 능력이 외상 후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하였다. 이는 정조의 학문적 소양이 외상 후 성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정조는 ‘존현각 일기’와 ‘일성록’ 등과 같은 기록의 습관을 통해 성찰하는 힘이 강화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Kim and Choi(2022)의 연구에서도 자기성찰은 외상 후 성장과 정적인 상관을 가지고 있고, 삶의 의미를 통해 외상 후 성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자기성찰 수준이 높아지면 삶의 의미가 활성화되어 외상 후 성장이 촉진된다는 것이다. 즉, 정조의 학문적 소양과 기록을 통한 성찰 능력은 인지적 능력의 향상과 삶의 의미 발견을 통해 외상 후 성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본 연구는 부모의 비극적인 죽음이라는 외상을 경험한 정조가 왕이라는 유사한 성장환경과 동일한 외상을 경험했던 연산군과 달리 어떻게 외상 후 성장을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분석하였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특히 외상을 겪은 사람들이 사회운동과 시민참여에 대한 헌신이 오히려 더욱 깊어졌고, 자원봉사 활동에 참여하는 비율이 높아졌으며, 이전보다 훨씬 더 깊이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게 되는 것으로 확인되는데(Patricia , Amy and Theresa, 2001), 정조의 애민 정신도 같은 맥락이라는 것을 확인했다는 것에서 의미가 크다. 외상을 극복한 사람들은 공감이 더 깊어졌다고 느끼고 그들이 견뎌낸 고통이 다른 사람을 돕는 일에 쓰인다면 무의미한 고통이 아니라고 고백하며,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 자신을 돕는 일이라고 한다(Richard and Lawrence, 2004). 정조 역시 백성들의 고통에 공감하며, 그들의 고통을 해결하려는 노력이 곧 자신의 고통을 해결하려는 것이라고 인식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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